실존철학-키에케고르의 실존
1.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19세기 전반기(前半期)의 온 유럽은 헤겔철학에 도취에서 있었다. 그리하여 신학자들 역시 그에 편승하여 신앙마저도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해명해버리는 그러한 분위기였다. 그 결과 신앙의 핵심인 진지성, 걸려 넘어짐(Argernis), 역설(Paradox)이 제거되었다. 신앙은 자연적인 일, 일상적인 일로 되어버렸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철학에 대해서 반대한다. 헤겔의 철학 속에서 구체적 인간,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실존이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문제되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그것을 붙들고 살 수 있는 주관적인 진리가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사상은 헤겔과의 사상적 대결에서 이루어졌다. 그 역시 초기에는 헤겔의 철학 즉 관념론에 열광했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헤겔이 그 밖의 철학자들의 모든 덕성을 지니고 있다고 서슴지 않고 인정한다. 아니 그저 인정할 뿐 아니라 나는 그것에 대해서 경탄을 느낀다”로 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불안의 개념』특히 『철학적 단편후서』에서 헤겔과 정면으로 대결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관념론적 철학을 떠나서 실존의 철학을 전개시킨다. 그가 헤겔을 비판하는 점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다.
(1)헤겔의 철학체계는 방대하고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신과 인간이 결국 그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신과 인간은 절대적으로 동일시 될 수 없다. 따라서 헤겔의 견해는 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2)헤겔의 관념론은 자연과 정신 또 세계사까지도 모두 포괄하는 체계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도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이 빠져있다. 그 속에는 “내”가 들어있지 않다. 즉 실존이 빠져있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정신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정신은 그 역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족에게 사명과 역할을 맡긴다. 따라서 이 개인이나 민족은 결국 세계정신에 의해서 조정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 실존은 세계정신과 같은 일반적인 것 즉 보편적인 것에 매몰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에 매몰될 수 없다. 실존은 저마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자립성, 독자성을 가진 존재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의 진리는 주체적 또는 실재적 진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존재를 통째로 걸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진리가 문제다. 그리고 “실상 온 세계가 무너져 버리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지 않을”그러한 진리가 중요하다. 이러한 진리에 비교하여 객관적 진리란 맥 빠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우리 머릿속에서 재구성해낸다는 것은 그리 주요한 것이 못된다. 결국 소용없는 것이다. 그 속에 내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2+2=4. 지구가 태양을 돈다. 시저가 BC 44년에 암살되다, 등 이러한 것들은 객관적 진리 임에는 틀림없으나 내가 그것을 붙들고 그것에 의지해서 살 수는 없다. 그 속에서 안심 입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없는 철학, 진리는 결국 소용없는 것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헤겔에 대해서 가졌던 근본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그는(헤겔)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을 지어놓고(정신철학의 세계) 자기는 그 속에 살지 않고 조그마한 오두막(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리 조그만 오두막이라도 내가 들어가 사는 그런 집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나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나”라고 하는 깊은 자각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그 이상도, 또 그 이하도 아니다. 철학은 인간 자기를 파악하려는 노력이요, 그 노력을 이론화하는데 있다.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마디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의 모토이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였던 것은 헤겔의 정신철학을 두고 한 말이다.
즉,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정신에게 그 한계를 깨우쳐 주고자 한 말이다. 인간은 무한하고 절대적이 아니라 죽을 존재임을 깨우쳐 주고자 한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처신을 모르는데서, 자기 자신의 “한정되어 있음”, “제한되어 있음”을 모른데서 방자해지고 오만해진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자각이란 결국 종교적 자각이다. 유한자가 무한자 앞에서, 시간에 제약을 받는 자가 영원자 앞에서 갖는 자각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이러한 자각에 도달하는 데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제 1 단계 : 미적실존
미적실존이란 제일 낮은 실존이다. 이러한 실존은 아름다운 것,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에게로 향하는 실존이다. 이런 실존의 사례는 두 사람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쾌락의 화신인 돈 후안과 권태의 화신은 네로황제다. 돈 후안은 스페인 전설에 나오는 방탕한 미모의 청년으로서, 1003명의 여자를 유혹하여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또한 네로황제는 제왕의 영광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생의 권태와 우수를 느꼈다. 그는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권태를 잊기 위해서 로마시를 불 질렀다. 그것은 옛날 트로이성이 함락될 때 충전하는 화염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러한 미적실존은 결국 인간을 실망하게 한다. 쾌락의 도취가 끝나면 더 없는 공허함과 허무감을 맛본다. 그리고 실망하게 한다. 여기서 나는 나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가게 된다.
제 2 단계 : 윤리적 실존
미적 실존은 인간을 절망하게 하고 드디어는 결단에 의해서 윤리적 실존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비본래적인 자기를 버리고 본래적인 자기를 각성하고 그리고 그것에로 돌아가는 것이 윤리적 실존이다.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지고, 정직한 태도로 살아가는 성실한 인간, 이것이 윤리적 실존이다. 윤리도덕의 지상명령은 “선을 행하라”, “악을 피하라”, “남을 사랑하라”이다. 그러나 여기에 윤리적 실존의 어려움이 있다. 인간은 자기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좌절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은 윤리적이 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도덕적이 되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자기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성실, 절대적인 희생, 절대적인 사랑은 우리 속에 미치지 않는 피안의 세계다. 여기서 윤리적 실존은 자기를 포기하게 된다. 아니 자기를 뛰어 넘게 된다. 그리고 종교적 실존에로 도약하게 된다.
제 3 단계 ; 종교적 실존
이제 윤리적 실존은 절망에 이르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이 절망이 바로 종교적 실존에로 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다. 이제 모든 한정된 한 실존은 “신 앞에 서 있는 단독자”다. 다시 말해 신 앞에 서 있는 단독자로서 만이 종교적 실존이 가능하다. 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만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신앙이 가능하고, 본래적인 자기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종교가 이론의 체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버려도 좋은 대단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신 앞에 홀로서는 것, 그것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