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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배경에 대해서

불타는 신디 2014. 9. 17.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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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신구약 중간사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침묵하고 있다. 이 중간사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데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이해, 더 나아가 ‘헬라화’를 통한 문명의 변화를 통해 구약과 신약에서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구약의 중간사에 있어서 먼저 다루어져야 할 내용은 B.C 333년에 일어났던 알렉산더의 동방원정부터 B.C 187년 로마에 대항한 안티오쿠스 3세의 죽음까지를 책에서는 먼저 다루고 있다. 이 시기를 초기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안티오쿠스 3세의 죽음은 헬레니즘 군주정치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중간의 시대를 헬레니즘 군주정치의 시기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이 기간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정치, 사회의 변화가 일어났다.

알렉산더의 원정이 있기 전부터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들은 이미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벌였고, 시돈의 텐네스 왕도 페르시아의 지배에 항거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은 모두 팔레스타인과 결부되어 일어났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해안평지의 일부는 시돈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아 지방 역시 페르시아가 반격에 나서자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팔레스타인을 이용하여 두 세대 동안 그리스의 원조를 받으면서 페르시아의 속박으로 벗어나 있었던 이집트를 재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을 시작하자, 마케도니안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은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구조로, 각 지역의 자치구를 인정해 주는 정치형태를 보여줄 수 밖에 없다. 특별히 알렉산더는 화폐와 재정을 제외하고는 정복한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끼친 영향은 어느 것이나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특히 신적인 숭배에 대해 유대인들은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가 세웠던 제국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심각한 권력다툼을 겪었으며, 팔레스타인도 급격하게 정치, 군사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류커스 왕조의 대립은 이후 450년 동안의 유대교 역사를 결정짓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입소스를 점령한 후 팔레스타인은 100년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지배는 팔레스타인을 새로운 방식으로 각인하고 변화시켰다. 경제와 건축 양식 등 여러 부분에서 헬라화 토착형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다양성으로 인해 쉽게 통일되지 못했다. 안티오쿠스 4세의 시대에 유대교의 헬라주의자들이 헬라화에 입각한 개혁을 현실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경향은 비유대교적이며, 헬라화된 주변세계와 보다 밀접한 경제, 정치, 문화적인 접촉을 가지면서 팔레스타인 안에서 유대인들의 상황을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헬라 문화와의 단절은 지속적인 불행의 원천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 3세로부터 셀류커스 왕조의 지배하에 팔레스타인이 놓이게 되면서, 팔레스타인은 급격하게 헬라니즘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사에 새로운 권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3세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같은 해에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결국 로마는 마케도니아와의 전투에서 어떠한 장애물도 없었기에 마케도니아는 B.C 197년 테살리엔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의 티투스플라미누스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로서 헬레니즘 군주국들이 몰락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안티오쿠스의 세력과 로마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전쟁은 B.C190년 북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방 동부의 리디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쿠스 3세와 셀류커스 군주국의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유대교의 헬라화에 대한 설명 혹은 다른 말로 유대교와 헬레니즘적인 문화의 대립적인 침략이라는 입장은 마카비 이전 시대에 해당한다. 헬레니즘이라는 개념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문화에 대한 명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헬레니즘이라는 문화는 팽창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고대의 유대교를 자신의 문화에 통합하고자 하였다. 헬레니즘 연구사를 보면, 구스타프 드로이센은 헬레니즘을 알렉산더에 의해 동방으로 ‘침략해 들어간’ ‘세계문화’라고 정의한다.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이라는 이 두 단어에는 모두 집합 개념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야만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정적 뉘앙스의 야만인이라는 명칭에는 그리스 세계 밖에 있는 ‘고도의 문명민족’이라는 의미와 ‘낮은 문명민족’ 혹은 ‘미개 민족’이라는 의미들이 이상할 정도로 뒤섞여 있었다. 헬라화의 개념을 분석하려면 매우 다른 구성요소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첫째는 직업상의 밀접한 관계, 둘째는 결혼에 의한 주민들의 신체적인 혼합, 셋째는 동양인들에 의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의 답습, 넷째는 ‘동양화된’ 그리스인들과 ‘헬라화된’ 동양인들의 완전한 동화를 구별해야 한다. 초기 헬레니즘 시대의 ‘헬레니즘’ 내지 ‘헬라화’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매우 강한 정치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다루려는 철학, 문학, 종교의 시각은 정치적인 요소에 비하면 2차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비중이 커졌다. B.C 2세기부터 스토아 사상의 세계시민이념이 관철되어 나갔고, 이 사상은 후기 헬레니즘과 초기 로마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이 되면서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이라는 오래된 대립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B.C 1세기 말의 패러다임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자의식은 헬레니즘 군주들의 분열과 서방에서의 로마의 상승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초기 헬레니즘 시대, 특히 B.C 3세기는 전통적인 종교와 계몽이 와해되던 시대였다. ‘헬라화’를 위한 최초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개인들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었다.

이후 드물게 나타나는 헬레니즘이라는 명사가 그리스식의 생활형태와 문화를 포괄하는 의미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문서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 가장 잘 접촉하기도 하였고, 그들로부터 많은 억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은 환경에 잘 적응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적응력은 그들이 헬레니즘 군대의 용병이 된 것과 그들의 군사적인 이주와 관련이 있다. 헬라의 왕들은 점령군 주둔지에 군대를 유지시켰고, 특히 ‘백성이 없는’ 왕의 영토에 병사들을 이주시켰다. [헤카타이오스 위서]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미 유대인과 사마리아 지원군은 이집트 뿐만 아니라 바빌론에서도 알렉산더 군대로 복무하고 있었다. 언어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 점령군 주둔지의 군대와 성직자들은 ‘헬라화’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급격한 진전을 이루었다.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용병들과 군사 이주자들 이외에 노예들, 농부들, 수공업자들에 의해 강화되어 나갔다. 파피루스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외적으로는 합법적인 생활형식을 가지고 그리스 환경의 헬레니즘 법에 적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발전은 이미 70인역에 부분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던 이집트에 살면서 아람어를 빠르게 포기하고 그리스어를 수용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유대인들의 비문과 파피루스들, 그리고 70인역을 포함하는 새로운 유대-헬레니즘의 문헌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압도적인 증거들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국가관리직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토라)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것과 예배에 그리스어를 도입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모세오경의 놀라운 문자적인 번역은 ‘조상의 율법’을 근본적으로 준수하려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번역가들은 초기 헬레니즘의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를 탁월하게 습득했던 남자들로 여겨진다.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어를 예배에서 혹은 국가적인 법의 수행 과정에서 실용적으로 번역하는 경험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70인 역은 수사학적인 유려함은 부족하다. 이 번역은 모방의 형식이 없는 문자적인 번역을 통해 독특한 언어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밖에 우리는 70인 역에서 유대인들에게 불쾌감을 일으키는 신인동형론이 약화되고 그리스 신화에대한 아주 미약한 호응, 지리학적인 세계상의 현대화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에 대한 분명한 정치적 고려, 이집트를 지배하는 법의 실행에 대한 모세법의 개별적이고 합법적인 동일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늦어도 B.C 2세기부터는 반유대적인 태도가 고라의 이집트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시민사회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단지 언어와 문학적인 교육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의 광범위한 부분은 이렇게 외적으로 완전한 ‘헬라화’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헬레니즘 주변세계에 무조건적으로 동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 문명과 그들의 언어, 그들의 문헌들과 그들의 사고에 대한 수용, 그리고 고대 유대교가 그런 사상을 통해서 고대세계와 투쟁했다는 사실은 매우 긴장감이 넘치는 이야기이다. 헬레니즘 문명의 수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팔레스타인 조국과 디아스포라 유대교에서 살았던 모든 계층들과 그룹들을 관통해 갔다. 그리고 이 헬레니즘은 정치, 경제 뿐만 아니라 지성과 종교의 영역에서도 잦은 접촉을 하게 했다. 그래서 개별적인 주민계층들과 집단들의 반응도 매우 다양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귀족정치는 새로운 생활형식과 그들의 교육을 위하여 스스로를 가장 강력하게 개방하였다. 고대 유대교는 낯선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그것들을 집중적으로 개선해 나갔다. 그리고 유대교는 그것을 통하여 낯설고 유혹적인 문명에 항거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대교는 스스로 낯선 언어의 옷을 입고 새로운 사상과 표현형식을 통해서 유대교에 위임된 자신들의 종교적인 유산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유대교는 역사 안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유지하는 내적인 능력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적인 입장을 고려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존재했던 팔레스타인 조국의 유대교도 ‘헬레니즘 유대교’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는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조국에 존재하고 있던 헬레니즘과 초기 로마의 고대 유대교의 역사를 참된 ‘복음의 준비’라는 입장에서 고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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