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음악(예배에 쓰일 수 있는 음악은 무엇인가?) - 이준영 전도사
예배와 음악
-예배에 쓰일 수 있는 음악은 무엇인가-
이준영
(한국성서신학대학원)
Ⅰ. 서론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서 뜨거운 감자는 ‘찬양’이다. 아니 좀 더 폭을 좁게 하면 예배에 사용하는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음악’이라는 것의 테두리 속에 우리의 논쟁이 되는 음악의 장르, 이 장르를 통한 악기의 사용 문제들이 거론된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두 부류가 찬양에 대한 논쟁으로 치열하게 싸운다. 찬송가를 중심으로 한 클래식의 음악과 악기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음악은 폭넓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대립한다. 안타깝게도 성경에서는 찬양에 대한 서술만 있을 뿐,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장르의 음악을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악기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구분을 주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뜨거운 신학적 논쟁이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제를 중심으로 논쟁할 것이다.
첫 번째로, 과연 음악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가?
두 번째로,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어떤 장르가 적절한가?
세 번째로, 예배에 사용되는 악기는 어떤 것이 적절한가?
Ⅱ. 본론
1. 음악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기독교는 시작부터 헬레니즘적인 사고에 영향을 받아왔다. 특히,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국교가 되었고, 국교가 되는 과정 속에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아왔다. 기독교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을 중심으로 기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조기연은 그의 책에서 음악사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음악이론인 ‘에토스’(ethos)에 따르면, 음악은 사람의 정신은 물론 영혼과 도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리듬, 음정, 화음, 템포, 볼륨 등의 조합이 듣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기쁨, 슬픔, 공포, 환희, 행복, 평화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기원전 380년에 쓴 『공화국』에서 “부드러운 음악만 너무 많이 들으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되고, 운동만 많이 하면 비사회적,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에,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음악과 운동, 두 가지를 조화 있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나약한 학생에게는 열정적인 음악과 운동을, 폭력적인 학생에게는 되도록 운동을 자제시키고 부드러운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음악가(교육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더 발전시켰습니다. … 이러한 음악의 힘과 성질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음악을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으로 나누게 하였습니다. …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 ‘좋은 신’을 여겨진 아폴로의 신전에서는 ‘좋은 음악’이 사용되어 사람들을 조용하고 차분한 심성으로 이끌었으며, 반대로 ‘쾌락과 향락의 신’으로 여겨진 디오니소스의 신전에서는 빠른 템포와 과도한 볼륨의 ‘나쁜 음악’이 사용되었습니다.
위의 주장처럼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은 헬레니즘 시대의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완성되어졌다. 즉, 이분법으로 보는 헬레니즘적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을 답습하였던 로마시대의 국교가 되는 과정 속에서 헬레니즘적 사고의 수용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찬송가를 중심으로 한 클래식 음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찬송가학의 역사적 고찰은 문제가 있다. 미첼, 로버트, H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교회사에서도 음악의 역할에 대하여 일치점을 보이지 않았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교회가 음악 발전의 중심이 되었었다. 수도원에서 음악형식이 발전되었고 기보법이 발전되었다. 중세때는 교회의 음악은 인간 경험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으로서 교육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에 음악은 교회라는 범주 밖의 생활에서도 발견된다.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회내에서는 매우 여러 가지로 음악을 사용하였다. 칼빈은 “특별히 연주하라는것 외에는 어떤 종류의 음악이건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adiaphora(특별한 성경의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양심에 따르는 것)의 영역이라고 했다. 초기의 종교개혁 시기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믿음과 실천에서부터 예배시 음악이 모두 금지되었으며(초기의 퀘이커교) 악기 없이 시편을 집회 찬송으로만 제한했고(엄격한 칼빈주의) 오르간과 성가대에게만 허락되었다(루터교와 성공회) 일반적으로 음악적인 우수성과 세련됨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형태의 음악을 나열한 것은 교회 음악의 역사를 요약해서 정리한다는 것보다 교회사속에서 음악의 일반적인 원리와 특징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서나 교회사에서 우리의 질문에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대답을 해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유대주의적 사고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데이빗 패스에 의하면 “피조물의 좋음은 하나님이 만드신 어떤 목적을 ‘위해서 좋은 것’(good for)일 때 성립되는 것이다.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동산에 있는 나무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창 2:9)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말 속에는 감각적인 만족이 잘못된 것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이 땅에 죄가 들어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어지럽힌 것이지 애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는 선한 것(하나님 창조 목적으로 쓰여질 때) 외에 악한 것이 없다. 성경에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루시퍼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여져야 할 음악이 다른 용도로 사용된 것을 이야기한다. 즉, 음악자체가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용도가 문제인 것이다. 헤럴드 베스트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제부터 나는,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예술 특히 음악은 도덕적으로 상대적이며 진리의 말을 분명히 표현하기에는(더 적절한 용어가 없다)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면서 그는 “믿음, 신조, 도덕적·윤리적 정확성 또는 심지어 세계관을 표현하는 능력 면에서는 예술과 음악은 본질상 중립적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음악과 예술은 선과 악한 것으로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음악에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은 없다고 주장한다.
음악이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기 때문에 음악을 정죄하거나 찬양하는 사람들은 모두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이들은 마가복음 7:15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을 간과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음악과 환경이 합쳐진 상황 속에서는 음악을 듣기 전에 하던 행동을 그대로 계속하고 있다. … 로큰롤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인 죄나 마약 남용에 빠져 들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좀더 성서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이미 마음속으로 성적인 죄를 짓거나 마약을 복용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은 로큰롤을 들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음악, 음악의 감정적 충격, 좀더 큰 환경을 자신의 세계관에 연관시켜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어느 특정한 음악이 우리로 하여금 예배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말할 때도 우리는 똑같은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 음악이 예배 분위기를 돋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음악이 성행위를 유발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음악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다윗의 예를 들고 있다. 사무엘상 16장 14절~23절까지의 내용을 가지고 사울이 악신이 들었을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니깐 사울의 악신이 떠나갔다는 구절을 들어 음악에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문제점이 있다. 그 이유는 사울이 악신이 들었을 때,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죽이려 든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윗이 수금을 타서 사울의 악신이 떠났다면, 같은 조건에서 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들었는가? 성경은 17장~18장 사이에 나타난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헤럴드가 말한 것처럼 음악이 사울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사울 안에 다윗을 죽이려고 마음을 가진 것이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이다.
위와 비슷한 예를 헤럴드는 사교집단에 관련된 청년의 예를 들고 있다. 그 청년은 사교집단에 있었는데, 그 사교집단은 특정음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다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사교집단에서 나와 유명한 교회를 갔는데, 누구나 알만한 곡을 듣고는 그 청년은 겁을 먹고 도망쳐 나왔다. 그 음악은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곡이었다. 바하의 곡은 기독교 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라고 대부분 사람들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럴드는 그 예를 통해 음악이 스스로 메시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과 연결된 기억과 교육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으로 옥성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이런 콘텍스트의 힘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음악 ‘그 자체’에 힘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물론 음악 그 자체에도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콘텍스트와 결합할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음악이 콘텍스트와 결합할 때 발휘하는 힘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명환은 그의 책에서 “성 어거스틴은 음악을 듣고 기쁨을 느끼는 것에 죄를 느낀 첫 번째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의 그런 고백에 대해 마틴 루터는 ‘이는 잘못’이라고 분명히 했다. 루터는 오히려 음악은 그에게 설교할 의욕을 가져다주고 슬픔의 영을 물리치는 것이기에 기쁜 느낌은 소망스럽기까지 말한다.”고 말하며, 음악을 듣는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들을 가지고 ‘나쁜 음악’, ‘좋은 음악’으로 구분짓는다. 음악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결과는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음악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분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결과물들을 통해 어떤 음악은 좋은 음악이고, 어떤 음악은 나쁜 음악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는 다르다. 옥성호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여기서 ‘부정적’이라는 말과 ‘나쁜 또는 악한’이라는 말의 차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이 무조건 선이 아니듯 부정도 항상 악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콜레스테롤은 몸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콜레스테롤을 ‘나쁘다 또는 악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콜레스테롤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단지 음악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음악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입니다. 결국 그것은 음악을 사용하는 인간 본성과 내면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어떤 음악이 우리 몸에 특정한 호르몬을 일으킨다고 그 음악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2.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 장르는 어떤 것이 적절한가?
성경에서는 예배 때 쓰여지는 음악적 장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이에 데이빗 패스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구약에 나타난 종교음악에 대해 통찰력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런데 사실인 즉, 음악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는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종교 음악 연주의 중심적인 곳 즉, 성전은 페니키아인들에 의해서도 지어졌다. 유대인의 성전과 페니키아인의 성전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유대의 성전은 신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폰 라트(Von Rad)는 “성가곡에 관한 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인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교로부터 모든 시가문학들을 가져왔다는 주장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고 말하였다. … 롤랑 드 보(Roland de Vaux)와 같은 신중한 학자도 열왕기상 5:11에 나오는 노래하는 자들의 목록을 인용하면서 결론짓기를, “예루살렘 성전의 처음 성가대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발탁하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너무 진보적인 생각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지그문드 모빙켈(Sigmund Mowinckel)도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기를, “의심할 여지없이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노래했던 것은 가나안 패턴으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였다. 이같은 역사적인 사실과 가능성들이 말해주는 핵심적인 결론은 이스라엘이, 거의 확실히, 주변 민족들의 음악 사용관습과 스타일을 똑같이 따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성모는 구약에 나타난 음악에 대해 정리하면서 “첫째로, 음악이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 속에서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다…둘째로, 이스라엘 민족의 음악은 예배를 위한 음악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그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삶에는 근본적으로 예배적 삶과 세상적 삶의 구분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야웨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활한다고 믿었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배음악과 비예배음악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예배에 사용된 음악이 곧 생활 음악이 되었으며, 반대로 삶에서 얻어진 음악이 곧 예배 음악으로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데이빗 패스는 신약시대의 음악에 대해서 “그러나 비록 예수님과 사도들이 어느 특정한 스타일의 음악은 원래부터 ‘성스러운’ 것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복음이 우리의 세상에 미친 영향을 보면 음악을 포함한 모든 것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는 모든 것 즉, 창조된 실재의 전부가 새롭게 되었다(고후 5:7)”
문성모는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에서만큼 음악에 관한 언급이 풍부하지 못하다. 신약성서의 음악을 살펴보려고 할 때 우선적으로 우리는 구약의 음악 전통이 그대로 전승되어 이어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성모는 결론적으로 성서에서의 음악에 대해 정의하기를 “음악에서의 성(聖)과 속(俗)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비성서적이라는 것이다.…예배음악은 그 예배가 행해지는 지역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 예배 음악의 기능 중에서 수직적 기능만을 고수하려는 잘못된 자세를 버리고, 수평적 기능으로서의 음악도 수용해야 한다. …참된 예배의 정신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을 함께 생각해 주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배에서 음악의 장르에 대해서 그 시대와 문화, 계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예로 지금 시대에 부르고 있는 찬송가를 성경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찬송가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찬송가의 편찬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기연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세기 미국과 캐나다의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전수받은 한국교회가 복음과 함께 이 복음송들을 물려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사용하던 통일 찬송가에는 총 558곡의 찬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중 절반이상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전도집회에서 널리 불리던 복음송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 다만 찬송가 책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의 내용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가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지 찬송가 책에 들어 있느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찬송가 442장(통 499장)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 종교사회학자 텍스 샘플(Tex Sample)은 이 찬송이 예배에서 부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찬송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이며,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찬송가는 한국교회가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 믿음을 전수받는 과정에서 찬양들을 전수받은 것이다. 찬송가라고 해도 그 안에 예배때 쓰여지는 곡으로는 문제가 있는 곡들도 있다면, 찬송가를 성경처럼 진리의 선상에 놓는 오류를 범하면 안된다. 물론 믿음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인한 세속적 물결을 비판하려는 자세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 믿음의 유산을 지키려다가 본질적인 부분을 놓친다면, 결국 전통을 중요시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를 것이 없다.
김남수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작품이 “기독교적”이냐 “비기독교적”이냐 하는 것은 그 작품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틀(form)이 아니라 정신(spirit)이다. 예배음악에서 내용이란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가사언어를 말하는 것이며, 형식이란 음악언어를 말한다. 그러므로 특정한 음악이 예배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속성에 매달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며, 반대로 특정한 음악양식이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음악은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변화시키는 요인은 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감추어진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헤럴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아름다움과 진리가 동일한 것이라면 추한 것과 비진리도 동일할 것이다. 예술적으로 열등한 복음송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똑바로 전하기는 하지만 미학적인 오류 때문에 즉각적으로 거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듣고 있는 음악이 수준 이하라 할지라도 진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리는 미학적인 미흡함을 초월할 수 있으나 미학적인 미흡함은 진리를 제거할 수 없다. 비진리를 아무리 아름답게 말한다 하더라도 비진리는 비진리이다. 아름다움이 비진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악은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예배 때, 그 진리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그 안에 담는 진리라는 본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 그릇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국 예배 안에 행해지는 것은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과 대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진리를 담는 그릇을 따지고 든다면, 설교 가운데 행해지는 예화들도 우리는 비판해야 한다. 예화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어떤 예화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없는 세속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그 커뮤니케이션의 그릇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그릇을 통해 진리를 노래하는 것, 그것이 예배 안에서 이루어 져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예배 안에서의 음악장르의 구분은 오히려 지역과 문화와 인종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구분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다양성의 문제이지,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3. 예배에 사용되는 악기는 어떤 것이 적절한가?
조영엽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관현악을 위한 악기들 이외에 교회에서 가장 적합한 악기들은 건반 악기인 오르간과 피아노이다. 현악기로는 바이올린과 첼로 등이다. 반면에 기타, 전자 기타, 드럼, 심벌즈, 키보드 등 리듬 악기들은 교회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헤럴드는 “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이 도입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쌍수를 들어 반대했다. 이교도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 괴물이 마귀의 악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이다”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오르간이 교회 안에서 정식으로 쓰여지는 악기로 채택된 이후 피아노가 들어왔을 때, 피아노는 교회 안에서 쓰면 안되는 악기로 취급되었다. 이유는 피아노가 헤머로 현을 두드리는 타악기와 같은 원리이기에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이 악기들이 오히려 교회 안에서 쓸 수 있는 악기가 되었다. 악기 자체가 신성하고 부정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가? 위의 주장대로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악기들을 원형 그대로 써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원형이 어떤 모양인지는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전통이 진리는 아니다. 아니 그 시대에는 오히려 이단시 되었던 악기들인데, 지금은 왜 괜찮은 것인가? 성경적인 조명 없이 단순히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성경에서 말하는 악기의 시작은 가인의 후손인 유발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기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게 봐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 안에서 원래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윗의 수금 역시 그 시대의 세속적 악기이니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시편 150편에 다양한 악기를 통해 연주하고 찬양하라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음악 장르는 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의 그릇이라면 그릇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악기인 것이다. 악기는 음악을 만드는 도구의 역할을 할 뿐이다. 악기의 역할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Ⅲ. 결론
예배에서 음악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전에 우리는 헬레니즘적인 이분법적인 사고를 어느 순간 수용하고서 그것이 성경의 진리인 양 인식하고 분석하려는 신학구조의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헬레니즘적 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설 수 없다. 특히나, 그리스 신화적인 이분법적인 철학의 구조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 시대에 배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죄가 들어와 타락하기 전에 그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회복을 그리스도인들은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은 선하기에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음악이란 도구 역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음악은 선한 것, 악한 것이라는 개념은 헬라철학의 틀에서 생겨진 것이며, 성경적 개념에서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예배 때 음악의 장르의 선택은 음악의 커뮤니케이션의 역할론을 생각해 볼 때, 그 시대와 문화, 인종, 사회를 반영하여야 한다. 이에 따른 악기의 사용에는 제한을 두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악기는 세속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악기 자체가 악하다는 편견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며, 이런 구분법은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이란 도구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에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예배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① 음악적 남용 : 음악으로 사람들의 감정이입을 시키려는 노력은 배제하여야 한다.
② 가사에 맞는 음악 장르 선택 : 옥성호가 그의 책에서 비판한 것처럼 가사와는 다른 음악적 비트나 음악의 사용은 자제해야 한다. 예배 때 사용되는 음악은 진리를 담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므로 가사와 맞는 음악적 장르를 선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음악적 은사를 가진 이들을 신앙적으로 훈련시켜 분별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③ 악기의 사용 : 악기의 사용에 있어서는 제약은 없지만, 예배를 드리는 회중을 고려한 음량의 제한을 두어야 한다. 음악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회중과 호흡하는 것이기에 회중을 너무 압도하는 음량의 사용은 피해야 할 것이다.
④ 가사의 신학적 검토 : 가사에 있는 내용이 과연 성경적이며, 신학적인가를 우리는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이 가사는 진리여야 하기에, 분명한 신앙적인 고백, 신학적인 고찰, 성경적인 검증을 거쳐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하기에 인간을 향한 가사를 철저히 배제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검증과정을 통해 예배가 하나님만을 향한 시간이 되도록 절제하며, 인간을 향한 음악사용을 철저히 금지하도록 하여, 음악의 논란에서 벗어나 예배 본질에 더욱 매진하는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이 되길 바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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