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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과 철학/종교 2014. 8.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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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宗敎學 [독] Religionswissenschaft [영] science of religion

    종교학이란, 종교에 대한 학문이다. “종교,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또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종교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종교학이란 인간의 삶에 깊이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교’라고 하는 현상을 일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 보려는 학문이다.


    종교학의 특성은 첫째로,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문제 삼는데 있다. 즉 종교학은 개별적 종교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한 개별적 종교의 타당성 내지는 그 정당성을 따로 문제 삼지 않을 뿐더러, 개별적 종교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또는 저러한 ‘진리’(眞理)를 개별적으로 문제 삼지도 않는다. 종교학의 특성은 둘째로, ‘이미 그리고 실제로 주어져 있는’ 종교현상을 문제 삼는다. 다시 말해 종교학은 우선 하나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종교이론을 비로소 엮어 내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이상적인 종교를 구성해 내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학은 종교를 종교가 아닌 다른 것에로 환원시켜 버려서는 안 된다.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차원을 ‘종교적인 것’을 종교적인 것이 아닌 것 즉 ‘참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등의 차원에로 환원시켜 버려서는 안 된다. 또한 종교를 인간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로 환원시켜 버려서는 안 된다. 종교학은 어디까지나 이미 그리고 실제로 주어져 있는 종교현상을 문제 삼는다. 즉 있는 그대로의 종교현상 그리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문제 삼는다.


    1. 역사적 배경 : 본격적 의미에서의 종교학이 학문으로 대두한 것은 지난 19세기부터의 일이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의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해 보려는 시도에서의 종교학은 근대의 신랄하고 근본적인 종교비판을 겪으면서 비로써 대두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은 태고 적부터 종교를 신봉해 왔다. 비록 그 형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할지라도,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그 고유한 종교를 신봉해 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태어나면, 그는 일정한 종교가 자기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는 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종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다른 민족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 다른 종교와 깊이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상에는 자기가 가진 하나의 종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즉 종교를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우연히 갖게 된 일정한 종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宗敎一般”을 문제 삼게 되었다.

    계몽시대(啓蒙時代, 17~18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자기 자신의 理性을 과감히 사용하라”는 계몽정신에 따라서, 이제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이성을 개입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理性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전통(傳統)’과 ‘권위(權威)’를 철저하게 배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계몽주의자들 눈에는 무엇보다도 바로 종교가 전통과 권위의 화신(化身)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계몽주의의 일차적인 비판의 화살이 향해진 곳은 바로 종교였다. 그리고 19세기에 대두한 실증주의(實證主義)는 사람들에게 종교란 쓸모없는 것이며 종교는 이제 단적으로 극복되어 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실증주의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는 인간 정신이 역사적으로 3단계를 거쳐서 발전해 왔다고 하였다. 즉 첫째, 인간정신의 유아기라 할 수 있는 ‘신화적(神話的) 단계’이다. 이 단계는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가상적(假想的) 단계이다. 둘째, 인간정신의 청소년기라 할 수 있는 ‘철학적 단계’이다. 이 단계는 구체적인 것을 떠난 추상적(抽象的) 단계이다. 셋째,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인간 정신의 성년기라 할 수 있는 ‘과학적 단계’이다. 이 단계는 실증주의적 단계이며, 이 단계에 이르러 인간은 비로소 모든 것을 스스로 관찰하고 검증하여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정신은 이제 비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을 얻어낼 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이제 종교를 신화적 단계 즉 인간정신의 유아기에 속한 것이며, 그 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린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이제 종교가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즉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깊이 심어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철학은 바로 ‘철학으로부터의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해 있는 듯 한 인상을 주고 있다.

    독일 관념론을 완성한 헤겔(G.W.F. Hegel, 1770~1831)은 종교를 철학에로 지양해 버린다. 헤겔에 의하면, 철학의 대상은 영원한 진리 즉 신(神)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종교를 설명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철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면서 결국 종교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는 헤겔에 의해서 철학에 해소되고 만다.

    이어서 헤겔 소장파에 속해 있던, 포에르바하(L, Feuerbach, 1804~1872)는 종교를 인간학(人間學)에로 환원시켜 버린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그 유개념(類槪念)으로 볼 때, 무한하다. 인간은 개체로 볼 때 한정되어 있으나, 그 유개념 즉 인류라는 입장에서 볼 때 한정되어 있지 않고 무한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 의하면, 종교란 바로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는 자의식(自意識) 즉 그 자체로 무한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는 자아의식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神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며, 神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아인식이다.” 이와 같이 포에르바하에 의하면 神의문제 따라서 종교의 문제는 결국 단순한 인간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마르크스(K. Marx, 1818~1882)는 포에르바하의 종교이론에 열광한 나머지, 종교비판은 그 근본에 있어서 끝나 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저승의 진리가 사라져 버린 이 마당에서 이제 이승의 진리, 현실의 진리를 정립하는 것이 역사의 과제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비판에 결론을 내리기라도 하듯이,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神은 죽었다”고 외쳤다.


    2. 宗敎學이 成立 :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몇몇 학자들은, 종교에 대한 철학적 토대를 모색하게 되었다. 즉 무엇이 종교인가? 종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종교에게 하는 ‘종교적인 것’(das Religiöse)은 무엇인가? 하고 진지하게 문제 삼게 되었다. 이러한 끈질긴 질문과 모색의 결과, 종교가 바로 종교적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거룩한 것’(das Heilige)이라는 사실에 착안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것’의 그 고유한 차원은 바로 ‘거룩한 것’이라고 하는 차원이라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종교의 철학적 토대로서의 ‘거룩한 것’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빈델반트(W. Windelband, 1848~1915) 이다. 그는 <종교철학 초안>(1884)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교는 그 고유한 차원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다른 것에로 즉 ‘참된 것’(眞, das Wahre), ‘선한 것’(善, das Gute), ‘아름다운 것’(美, das Schöne)등에로 환원시켜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종교는 그 고유한 ‘거룩한 것’(聖, das Heilige)이라는 차원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바로 ‘종교적인 것’ 즉 ‘거룩한 것’을 문제 삼고 그것을 추구한다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을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에로 환원시켜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것’을 결코 철학, 인간학, 심리학 등으로 환원시켜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빈델반트의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 ‘거룩한 것’을 좀 더 넓게 그리고 좀 더 깊이 작업해 나간 것은 오토(R. Otto, 1869~1937)이다. 그는 1917년 <<거룩한 것>>(Das Heilige)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룩한 것’에 대한 기본적 작업을 전개시켰다. 그 뒤 셀러(M. Scheler, 1874~1928), 틸리히(P. Tillich, 1886~1965),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 벨테(B. Welte, 1906~1983), 엘리아데(M. Eliade, 1907~ ) 등은 그들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오토의 기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좁은 의미로 ‘종교학’을 전개하고 있다. 종교는 하나의 경험 내지는 체험(體驗)을 토대로 하고 있다. 즉 ‘종교적인 것’ 즉 ‘거룩한 것’에 대한 체험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 내지는 체험 없이는 종교가 성립되지 않는다. 종교란 한마디로 ‘거룩한 것’과 ‘인간’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한 것’을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한 것을 일정한 형태로 표현하게 된다. 첫째로, 그것은 ‘말’(言語)로 ‘이야기’로 표현된다. 이것이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신-화’(神-話)와 ‘상징’(象徵)을 형성한다. 둘째로 그것은 ‘행위’(行爲)로 특히 집단적 행위로 표현된다. 이것이 ‘제의’(祭儀)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일정한 ‘신-화’와 ‘상징’ 그리고 일정한 ‘제의’는 또한 스스로 ‘거룩한 것’을 드러내 준다. 즉 일정한 신화와 상징 그리고 일정한 제의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① 거룩한 것 : ‘거룩한 것’이란 오토에 의하면, ‘두렵고 떨리는 그리고 우리를 열광시키고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것’은 한편으로 우리를 두렵고 떨리게 하는 그러한 신비이며, 다른 한편 우리를 열광시키고 또한 사로잡아 버리는 그러한 신비이다.

    ‘거룩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비’이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다.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것’ 또는 ‘저러한 것’이 아니다. ‘거룩한 것’은 이들과는 ‘다른 것’, ‘전혀 다른 것’(das ganz Andere)이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본격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개념화 할 수도 없다. 또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편에서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거룩한 것’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리면서도 또한 그에 사로잡혀 버린다. ‘거룩한 것’은 한편으로, ‘두렵고 떨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이다.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그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때 이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그러한 두려움이다. 영혼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그것을 뒤흔들어 놓는 그러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낀다.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거룩한 것’ 그것만이 ‘모두’이며, 그것을 체험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마치 ‘무’(無)인 것처럼 느낀다. 인간은 ‘거룩한 것’ 앞에서 전적으로 압도되어, 떨며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없게 된다.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룩한 것’은 다른 한편, 우리를 ‘열광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Mysterium fascinosum)이다. 즉 인간은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거룩한 것’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면서도, 동시에 열광하게 된다. 그 마음이 사로잡혀 버린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끼며, 한없는 행복을 맛보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제 다른 어떤 것도 따로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 그것은 ‘모두’이며, ‘일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한없이 거기 머무르고자 한다. 영원히 거기서 살려고 한다. 결국 인간은 그것에 사로잡혀 그 앞에서 떠날 수 없게 되고 만다.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이러한 양면성을 띤 종교적 체험을 ‘불’(feu)이라고 표현하였다. 모든 것을 태워 삼켜 버리는 불의 위력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그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들지만, 불은 또한 그 빛나는 광채와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룩한 것’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된다. 즉 ‘두렵고 떨리는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종교적 인간’(宗敎的人間)이라고 한다.

    ② 신-화(神-話)와 상징(象徵) : ‘거룩한 것’은 신비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볼 때,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 있지 않다. ‘거룩한 것’은, 그것이 자기를 드러낼 때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직접 보여 주지 않고 다만 간접적으로 자기를 보여 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것’은 결코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자기와는 ‘다른 것’ 즉 ‘속된 것’(das Profane)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때 ‘거룩한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이러한 것’ 또는 ‘저러한 것’에로 한정되게 마련이다. 즉 일정한 형태로 제한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그것이 드러날 때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과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고 ‘거룩한 것’은 그들을 통해서만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거룩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그것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을 통해서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거룩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역시,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거룩한 것’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신-화’와 ‘상징’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즉 ‘신-화’와 ‘상징’은 그 자체로 또한 ‘거룩한 것’을 드러내 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통하여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바로 ‘거룩한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물, 사건과 같이 인간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 즉 ‘신-화’와 ‘상징’ 역시 여러 가지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종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지 종교가 존재하도록 만들어 준다. 또한 다른 한편, ‘거룩한 것’에 대한 이야기 즉 ‘신-화’와 ‘상징’은 단순히 이러한 사물 또는 저러한 사물, 이러한 사건 또는 저러한 사건, 이러한 인간 또는 저러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 그칠 수 있다. 즉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체험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종교를 배척하게 만들고 또한 종교일반을 부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는 이러한 또는 저러한 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일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는 그 근본적 이유이다.

    ③ 제의(祭儀) : ‘거룩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신-화’와 ‘상징’에 담아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그 이야기의 내용을 ‘행동’으로 특히 집단행동으로 재현하게 된다. 바로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물,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인간을 다시 회상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재현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 특히 ‘집단행동’이 ‘제의’를 형성케 한다. 그리고 ‘거룩한 것’에 대한 체험을 회상하고 재현하는 ‘행동’ 즉 ‘제의’는 또한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행동’ 즉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즉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재현을 통해서, 바로 ‘거룩한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교적 인간’이 된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사물, 사건, 인간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회상 그리고 재현 역시 여러 가지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또한 종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또한 세상에는 다양한 여러 가지 종교가 존재하도록 만들어 준다. 또한 다른 한편, ‘거룩한 것’에 대한 회상, 재현은 단순히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물,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인간에 대한 회상과 재현에 그칠 수 있다. 즉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거룩한 것’에 대한 회상과 재현에 참여하면서도 ‘거룩한 것’을 전혀 체험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종교를 배척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한 종교일반을 부인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는 이러한 또는 저러한 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일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게 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3. 종교와 종교들 : 종교란 그리고 ‘종교적인 것’이란 ‘거룩한 것’에 대한 경험 내지는 체험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두렵고 떨리는 그리고 우리를 열광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그러한 신비에 대한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란 한 마디로 ‘거룩한 것’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그 근본 이유는 ‘거룩한 것’에 대한 ‘체험’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체험은 또한 다양한 구체적인 종교들을 낳게 한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 종교 간의 대화의 문제를 대두시키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종교 간의 대화의 문제는 종교에 있어서 하나의 근본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 하나의 종교가 그 자체로는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거룩한 것’을 문제 삼고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났고 또한 체험되었던 구체적인 모습과 형태를 끝까지 고집할 때, 종교 간이 대화의 길은 막히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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