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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구약 배경사 필기내용 일부
    기독교 /기독교를 더 이해하기 2014. 9. 2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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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구약 배경사

    신화 논쟁

    -     이집트 신에 대한 것
    인간은 신의 대한 이해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해하게 되어 있다.
    신의 존재라는 것은 부분적인 형태로 다양한 신들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집트에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인 기원전 3500년경, 자연의 동물의 형상으로 신을 표현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에 의한 것일 것이다.

    만물이 가지는 다양한 것을 초월자로 보게 되는 경향을 띤다. 즉, 다양한 신들로 나타난다.
    다양한 이름을 가진 신들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 안에 이런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는 제신통합주의를 발생하게 된다. 유일신적 성향과는 반대된다.
    이집트는 2천에 달하는 수많은 신을 만들게 되었다.

    이집트의 신들은 본질상 자연에 내재하였기 때문에 공간을 초월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즉, 신들의 제한성들을 띄고 있다.

    신들의 활동을 인간과 결부시켰으며, 자연의 작용도 인간의 생명의 견지에서 이해하곤 했다.

    신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다양한 폭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해했던 신의 이해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특정한 신보다는 여러 신들과 연결되고자 하였다.

    고대 근동의 특징은 도시 중심(도시 국사 형태)를 띄고 있다.
    도시 국가 형태는 하나의 신들을 가지고 있다.

    내세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사회에서의 양육강식의 원리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성경은 계시종교이지만, 이집트의 종교는 만들어진 신을 숭배하는 종교로 분류된다.



    4월 12일

    주변국가의 이야기
    블레셋은 어원적인 말로 ‘해양민족’이란 뜻이다. 성경에서는 블레셋을 함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다.

    성서 안의 내용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기 위한 것이기에 성서 밖의 다른 자료를 통해 성서를 해석하지 않기
    서로 문화를 주고 받을 수는 있지만, 차용했다는 이론은 제외하도록…
    헬라문명에서 기원전 2세기 유대인을 포함한 지역을 팔레스티인 이라고 부른 것이 어원이다.
    시리아 쪽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팔레스타인을 끼고 있는 문화들이 성서 속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겠는가 하는 문제를 발생하게 된다. 후기 선지서들을 보면 인근 지역의 명칭들과 국가들이 등장한다. 암 1장 (드보아 지방 사람 ) 주변 국가들을 돌려 이야기를 하다가 유다와 이스라엘로 진행되고, 결국 북 이스라엘의 경고로 말한다. 예언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의 이해가 필요하다.

    우가리트는 기원전 3000년전부터 시작하여, 방대한 양의 유적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1974년 이후부터 활발한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고대 문명을 통해 그들의 문화의 종속적  개념들을 엿볼 수 있다. 아마르 문서에 의하면 기원전 14-13세기에서 정치적 종속관계가 있었다. 벧세메스(태양의 집)는 19왕조때, 종교적인 신전의 이름이다. 예)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
    메사비문에 모압을 오므리가 지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오므리에 대한 기록이 별로 할당되지 않았다. 성경은 왕들을 조명하는 신학적 관점에서 왕가를 기록하고 있다 . 성서의 역사는 주변국들과의 정치적인 우위에 있었다고 해도 정치적인 관점이 아닌 신학적인 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변국가들의 기록에서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적지 않다. 시리아 지역 (북동쪽의 이스라엘 인근지역)에서는 경제적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계약문서들이 발달하였다. 경제적인 힘이 정치와 종교의 힘과 결탁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가리트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자손들이 번져나가는 인종의 확산에 대해 설명할 때, 함 자손들이 가나안을 정령하고, 시리아 지역 까지도 영향력 안에 있다. (유투브에 라쉬아, )
    기원전 2000년에서 1000년까지 다민족, 다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항구도시이었기에 가능했다. 물물교환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항구도시가 없다. 가나안 지역은 나일강의 유입되는 모래와 흙으로 인해 포구들이 발달되지 않고, 모래사장이나 언덕들이 있는 것이다.
    정주문화가 싹트기 시작되었다. 이것은 농사, 경작 짓는 문화가 발달하였다. 농업의 혁명을 이루고 발명품들을  발전시켰다. 창세기의 라멕의 노래는 철기 문화를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라멕의 시대는 언제일까?? 문명의 단절은 앞선 문명의 단절과 곧 새로운 시대의 미미한 시작이 공존할 것이다 . 노아의 홍수로 인해 문명의 단절이 있었을 것이다.
    우가리트는 기원전 4000여년경부터 도시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도시기획이 될 정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2000여년 경에 문화의 단절이 잠시 있었는데, 아므리 족의 대민족 이동이 있었는데, 이 시기가 성경에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이동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시리아 지역에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데, 점진적인 정착문화와 도시 문화를 강화하는데, 이때 금속제가 발달한다. 은으로 된 신상들이  많이 발견된다.
    미케네 문명의 영향을 우가리트는 영향을 받았다. 고대의 문명은 해양민족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블레셋 민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16-14세기의 유물로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에 발견된 문헌들에는 신화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 문명은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볼 수 있다.
    이집트와의 끊임없는 무역이 있었다, 기원전 1300여년까지 이집트와 영향력을 주고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항로기술이 발달하였다. 이집트는 육상으로 우가리트는 교류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집트의 영향권  아래 있을 수 밖에 없다.
    우가리트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발달한 도시가 될 수 밖에 없는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다. 히프로스를 중심으로 아나프리아를 비롯하여 무역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아마르에서 발견된 문자는 쐐기문자이다. 이 쐐기문자는 우가리트의 문자에 영향을 받았다. 우가리트의 신들의 족보는 가나안의 신들의 계보와 유사성을 가진다. 이것은 가나안은 우가리트의 종교적인 종속적 관계를 보여준다.
    우가리트에서 나온 언어의 유사성은 지역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성서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언어의 유사성을 지닐 수 밖에 없다. 같은 생활문화권 속에서 지정학적인 영향권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서로의 교류 속에서 언어의 습관 중 하나가 운율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셈어가 가진 모음의 단조로움과 20개 안팎의 자음 속에서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다.
    고대 근동의 성서 밖의 자료들을 통해 성서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개연성을 보여준다. 동일한 시대에 각기 다른 문화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

    렘만트 지역에서 페니키아, 에돔이란  국가가 중요하다. 에돔의  출연은 에서의 후예로 세일산에 거주한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맥밀란 성경지도)
    에돔의 기록의 최초문헌은 이집트 문화에서 발견된다. (메르멧다) 기원전 1200여년 전에 여기에 최초의 문헌으로 이스라엘이 최초로 언급되고 있다. 이집트의 지배가 이 당시 요단 동편 지역까지였다. 에돔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세일땅의 언급은 람세스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12세기의 문헌들로 에돔에 대한 언급이 많다.


    4월 19일

    1.     장세훈 교수-신화논쟁(중간고사)
    2.     최창모 교수-블레셋에 관한 연구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역사적 배경으로 갖는 것은 종교사학적으로 차이가 있다.
    르네상스에서는 하나님과 신에 대한 종교적인 것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종교적인 것들은 전부 인간의 심리적인 것들로 인식하였다.

    구약 성서에는 두가지 길이 있다.
    신명기와 역대기의 길이 있다.

    여호수아~열왕기 까지는 신명기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것,
    이사야~12소선지서는 역대기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것.

    정중호 교수-고대 이스라엘의 국제 무역에 관한 연구
    가나안 땅을 보통 ‘상인의 땅’으로 국제 무역에 참여하였다 .

    5월 3일
    국가 출현과 함께 정치철학등이 이슈가 된다. 국가출현  이전에는 신화적인 세계관에 지배를 받았다면, 철기시대 이후 국가의 출현이 빈번했고, 국가의 출현 이후에는 계약법에  의해 형성되게 되었다. 신명기에서는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등을 균형을 가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가의 힘은 종교적인 힘이든지, 경제적인 힘이든, 군사력에 대한 힘을 의미한다. 기원전 10c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이 중앙집권되지 않은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솔로몬이 이때,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국제 교역의 중심지가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지정학적인 위치에 의해서 가교적인 역할을 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해상무역을 할 수 없어 두로와 시돈지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솔로몬은 반 신명기적 왕이었다. 땅과 민족과 주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상징들인데, 솔로몬이 무너뜨렸다.
    분열왕국이 되었던 것은 계약법의 위반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신명기 관점에서 왕들을 평가하면서 왕들을 조명한다면, 역대기 관점 (에스라~느헤미아, 다니엘)으로 왕을 평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소견대로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유기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힘의 논리, 경제적 논리에 의한 것을 통해 종주국으로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때, 이스라엘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



    5월 17일
    성서의 세계관은 통일된 사관은 언약사이며, 구속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더 큰 그림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고 있다. 세계관의 변이 속에 제국주의는 사회계약법의 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동체가 조약에 의해서 형성되며, 힘의 논리에 의해 공동체가 형성된다. 힛타이트 조약을 고대근동의 조약의 기본적인 형태라고 보는데, 이런 조약이 보여진다. 이스라엘의 멸망속에서 예언자 운동은 그 사회가 부조리로 갈등구조가 나타나는데, 이런 것을 악으로 보고 있다 . 세계관에서의 멸망은 힘의 논리에 의해서, 성서에서 보는 멸망은 언약의 파기에 의한 결과로 본다. 성문서의 역사서에 해당하는 역대기 , 에스라-느헤미아, 다니엘서 등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후기 역사는 멸망 이후 성전과 토라를 중심으로 다시 재조명되는 역사기록들이었다. 경계성에서 순수성을 지키는 운동이 일어나 결국 바리새인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배와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조명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멸망이 결국 혼합주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과거로부터 거룩, 성결, 정화운동으로 강조되었고, 결국 종교제의가 강조되었다. 2-3세기에 이사야의 기록들을 통해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유대교 안에서는 결국 아키바라는 랍비를 통해 종교적 관심이 나타난 것으로, 이제는 성전의 예배가 기도로 대치되는 유대교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신구약의 중간사에서 중요한 것은 페르시아 종교, 헬라 사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학개라는 뜻은 곧 축제라는 뜻을 의미한다. 신구약 중간사에서 메시아의 사상은 신약적인 관점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터닝포인트는 포로후기로서 유대의 전통을 새롭게 형성하는데, 메시아의 사상은 묵시문학에  나타나게 된다.

    헬라의 독립적이며, 도시적인 문명이 페르시아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헬라문명의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 발전되며, 이를 알렉산더에게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더는 헬라문명의 통일성을 꿈꾸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더는 언어와 경제, 화폐, 문화등을 하나로 묶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

    5월 24일
    마카비 전쟁:
    알렉산드리아를 기본으로 하는 프톨레마이오 왕조는 이미 헬라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프리카 문화가 아닌 헬라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헬라화는 세계화였다. 언어와 문명을 헬라화…
    그리스의 비극: 서양문화에서 이루고 있는 사상적 기초가 헬라문화이다. 비극에는 세사람;(소포클레스, 에피카르노스, 아이킬로스)-실질적으로 세가지 유형을 보여지고 있다.
    1)일상적 삶(사회적 체제, 가치체계)을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체제 속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적인 체계에 적응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 대해 비극이라 묘사하고 있다.
    비극이 상징하는 것이 삶에 대한 고민을 상징한다.
    디오노소스는 인간 최고의 삶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쾌락(몰입되어서 누리는 황홀경)을 이야기한다. 시네노스가 이런 물음을 던진다. 마이더스 이야기를 통해 상징성이 있다. 이것은 부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추구해야 될 가치가 있는가?
    2)디오노소스가 시네노스에게 최고의 선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차선의 선은 무엇이냐고 묻자, 시네노스는 빨리 죽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3)빨리 죽는 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쾌락(감각으로 느끼는 것, 즉 오감으로 느끼는 것)을 추구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광란으로 치닫는 것. 이 쾌락의 가장 클라이막스는 음악으로 묘사되는 것이었다.
    예술을 감각에 몰입하고, 집중하여 광란, 황홀경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문화가 알렉산드리아 및 안디옥에 팽배했다. 이 문제 이후 정치적인 것들과 결부되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안에서의 헬레니즘을 살펴보자.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인층들은 유대인이 많이 있었다. 신앙적, 자주적 자유를 허락했다. 세루쿠스 왕조 이후 자주권을 박탈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것들을 말살한다. 유대인들의 할례와 안식일과 제사에 대한 자유도 박탈한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것에 나타난 운동이 하나 있다. 이것이 마카비 전쟁을 태동케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주권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것은 묵시적인 사상에서 메시아 사상이 발달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농업과 농산물을 통치하는 자들이 가지려는 사회양상을 보여준다. 도시문화에 종속되어지는 조세가 필수적이 된다. 즉, 상류층만이 즐기는 문화이다. 이런 문화적인 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류층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신제도가 정착하게 된다. 세금을 충당하기에는 힘든 것이다. 즉, 결혼은 신분상승의 도구가 되었다. 이것을 통해 헬라화 된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의 제조업이나 상업에서 자유인으로서 소유한다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이것은 통치자가 통치하기 위해 종속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는데, 그로인해 많은 조세를 거두었다. 팔레스타인은 그 속주국 중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그 땅에서 하염없이 조세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기원전 200년부터 쇠퇴하는 그리스가 로마에 의해 패권이 바뀌자, 속주로 있던 팔레스타인은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지역이 되었다. 그들은 소작인으로 단지 2중, 3중으로 세금을 내는 것이었다. 특별히 종교적인 세금은 정화를 필요로 했고, 소작인들은 제물을 돈으로 사는 것이 편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2중 3중의 가혹한 짐을 지었다. 문화는 헬레니즘적인 사상으로 인해 그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그들은 헬레니즘 문화에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갈등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름 역시 헬라이름으로 가지는 것이었다. 포로귀환이 정착한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다.
    전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가 생길 수 있었던 이유는 장소에 국한된 하나님이 아닌 것이었다. 묵시사상에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다윗의 왕조가 다시 발생했을 때라고 본다. 여기에서 바벨론 탈무드가 나오게 된다. 이것은 전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판례법을 형태를 따른다. 애매한 기준들을 정리한 것이 탈무드이다. 신조적 가치에서 상황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지배하는 헬레니즘과의 싸움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문화에서 반대했던 민족들이었다.
    이때 외경이라는 유대문화가 나타난다. 이때 나타난 사상적 체계는, 영생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고, 이집트의 신화속에서도 나온다. 이런 문화 속에서 유대문화를 지키기 위한 국수주의적 문화운동이 외경이다.

    5월 31일

    유대교 안에서 사상의 변화가 문화적인 변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헬라시대의 교육과 문화의 변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문화의 대중성은 사상의 체계를 길들이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구약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공의와 정의를 하수같이” 만드는 것, 이것은 곧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헤롯의 건축사업은 로마의 도시 건설을 모티브로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헤롯은 극장, 육상경기장등을 만들었는데, 로마의 대중적 문화코드의 장이었다. 건축은 오늘날 자아의 예술적 가치를 표현하는 양식이다. 예술은 철학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복합체이다.
    중간기의 신학적 사상은 초월자에 대한 것, 이것은 하나님을 뜻하기도 하지만, 헬라 문화를 통해 초월자 신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가장 중요한 테마는 하나님에 대해, 특별히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이해하며, 종말사상으로 묵시문학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초월자와 인간과의 중재자, 즉, 천사에 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외경에는 자연에 대한 것들이 천사들이 책임자로 표현되기 했다. 중간사 시대에 나타난 외경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의 방문이 표현되고 있다. 이때, 악이라는 것에 대한 기원과 실존과 내재에 대한 질문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헬라신화의 영향에서 나온 외경의 발현이지 않을까?? 미쉬나 시대, 또는 탈무드 시대라고 하는 시대가 나타난다. 에스라 2서에서는 율법을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관점을 내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에스라 2서 8장 5절에서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 지혜서에 의하면 지혜는 하나님의 능력의 입김이며, 전능자의 역량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지혜를 영원한 빛에서 발해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선조들의 어록”이란 책을 보면 이 시대의 유대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헬레니즘 세계를 지나야 기독교의 풍성한 완성도를 만날 수 있다. 즉, 헬레니즘의 구약, 신약의 중간기가 없었다면 풍성함을 누릴 수 없었다.

    6월7일
    헤롯은 첫 10년은 숙청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도시의 로마화는 이스라엘에 중화작업을 통해 유일신 사상의 흠집이 났다. 그의 아들들도 경쟁적으로 로마도시화 했다. 이로 인해 필요한 재정으로 인해 착취를 일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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