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 기준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Criteria of Ethical Judgments of Human Life
최영태 (한국성서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국문초록>
인간의 삶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인간 행위 또는 인격의 옳고 그름 또는 선악에 대한 판단의 기준으로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할 때에 그 행동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윤리학에 있어서 무엇이 진정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목적론적 윤리방법론, 의무론적 윤리방법론, 상황윤리적 방법론, 응답론적 윤리방법론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논문은 위에 말한 네 가지 윤리 방법론들과 현대 윤리학자들(프랑케나, 김태길, 가이슬러, 롤즈)이 제시하는 몇 가지 윤리이론들과 성서가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비교 검토해보고, 이들 각 이론들의 장점들을 살리고 단점들을 보완하면서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바람직하고 타당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이 논문은 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꼭 필요한 요소는 ① 사물의 이치와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로서의 진리성, ② 인간에게 유익한 것으로서의 선, 그리고 ③ 사람들 사이의 비례적 평등으로서의 공평성이 있어야 함을 보았다.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 되려면, 그것이 최소한 이 세 가지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 기준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고, 그리고 한 사회 또는 공동체에 있어서 그 기준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각 구성원들마다 그들이 가진 세계관, 가치관이 다르므로 그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세계관, 가치관의 일치를 꾀하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공통의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행위에 있어서 규범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가이슬러가 제시한 바와 같이 차등적 절대주의의 방법을 따라 각 규범이 추구하는 선의 내용을 비교해 보고 더 중요한 선을 추구하는 규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주제어: 윤리적 판단 기준, 진리, 선, 공평성, 윤리이론, 세계관, 가치관.
서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행위가 나에게뿐만 아니라 내 이웃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로 우리는 행복하게도 되고 불행하게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삶 또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옳은 행동을 하고자 하며, 또한 내 이웃의 행동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판단하여 칭찬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인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옳고 그름은 어떤 기준을 근거로 하여 그 기준에 맞는 것을 옳은 것이라 하고, 그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적 판단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프랑케나는 그의 책 『윤리학』에서 규범 판단을 크게 도덕 판단(또는 윤리 판단)과 도덕과 무관한 규범 판단으로 나누고, 도덕 판단(또는 윤리 판단)은 크게 도덕적 책임 판단(또는 의무 판단)과 도덕적 가치 판단(또는 덕성 판단)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도덕적 책임 판단(judgments of moral obligation)이란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고, 도덕적 가치 판단(judgments of moral value)은 인간의 인격(동기, 의사, 또는 성품 등)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란 인간의 삶 즉 인간의 인격 또는 행위에 대해 선악 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란 인간의 인격 또는 행위에 대해 선악 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한다.
인간의 윤리적 삶에 있어서 윤리적 평가와 판단의 기준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인간 행위(또는 인격)의 옳고 그름 또는 선악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할 때에 그 행동 선택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리학에 있어서 무엇이 진정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목적론적 윤리방법론, 의무론적 윤리 방법론, 상황윤리적 방법론, 응답론적 윤리방법론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논문은 위에 말한 네 가지 윤리 방법론들이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들을 비교 검토하고 그 장단점을 고찰해보며, 또한 이 윤리 이론들 외에 현대 윤리이론가들이 제시하는 몇 가지 윤리이론들과 성서가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비교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각 이론들의 장점들을 살리고 단점들을 보완하면서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바람직하고 타당성 있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보고자 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필요함에 대해서 김희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개인적 · 사회적으로 매 순간마다 윤리 도덕적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의거하여 개인적으로 행동하거나 사회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한다. 윤리 도덕적 결정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내리는 결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윤리도덕적 판단을 하는데 사용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근거를 바탕으로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가?
그리고 이러한 윤리도덕적 판단을 위한 근거를 제시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서 목적론적 윤리방법론, 의무론적 윤리 방법론, 상황윤리적 방법론, 응답론적 윤리방법론의 네 가지를 제시하고 그 장단점을 비교 검토한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김희수 교수가 제시하는 이 네 가지의 윤리방법론을 검토하고, 기타 현대의 몇 가지 중요한 윤리이론과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고찰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 중 가장 적절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 또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검토할 것이다.
1. 목적론적 윤리 방법론
목적론적 윤리방법론은 인간 삶의 최종 목적에 근거해서 인간의 행위 또는 규범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방법론이라고 할 것이다. 김희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적론적 방법은 최종 목적과 결과에 의거해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윤리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에 의거하면 어떤 행동이나 규범이 최종 목적을 성취하는데 기여하며, 최대 결과를 낳는데 기여하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나 규범이 되고 그 반대일 때는 비도덕적이요 비윤리적인 것이 된다.
김희수 교수는 여기서 윤리적 판단의 대상으로 행동과 규범을 말하는데, 인간의 행동(곧 행위)에는 개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사회 정책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삶의 궁극적 기준으로서 최종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데, 인간 행위의 결과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라기보다는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 행위의 결과는 다만 예측할 수 있을 뿐 그 완전한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윤리방법에 있어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인간행위의 최종 목적인 선(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프랑케나는 목적론적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데, 그 내용은 결국 김희수 교수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목적론적 이론들에 의하면,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며 의무가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기준이나 척도는 산출될, 도덕과 무관한 가치라는 것이다. 직접적인든 간접적이든 간에 최종적인 근거는 산출될 선의 상대적 분량이거나 아니면 산출될 악을 뺀 선의 상대적인 양이어야 한다.
여기서 도덕과 무관한 가치란 인간의 삶에 유익을 가져오는 것 곧 선을 말하며, 결국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행위의 목적으로서의 선 또는 가치의 양이라는 것이다.
김희수 교수는 목적론적 윤리방법론의 대표적인 예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과 윤리적 이기주의, 그리고 공리주의를 들고 있다.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는 여러 목적론적 윤리방법론들 중에서 그래도 공리주의가 가장 타당한 윤리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목적론적 윤리방법론은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에 의해 인간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윤리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고, 추구하는 목적에 어긋나는 행위는 옳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행위의 목적은 선(善) 또는 행복(幸福)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 중 하나는 선 또는 행복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선(또는 행복)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선이란 “인간의 삶에 유익이 되는 것”, 또는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선이란 인간 행위의 목적이 되는 것이고, 인간 행위의 목적은 곧 인간의 삶이 잘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행위의 목적으로서의 선 또는 행복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선 또는 행복의 내용이 다른 것은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선 또는 행복의 내용에 대한 생각 곧 가치관은 각 사람의 세계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따라 그의 가치관 곧 그의 선 또는 행복의 내용이 달라지고, 따라서 그의 윤리적 판단 기준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동의 기준을 가질 수는 없는가? 각 사람은 각자의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 각자의 윤리적 기준에 따라서 살겠지만, 인류 공동 사회에서는 공동의 기준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준이 없으면,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 사회에서는 공통의 세계관에 따라서 공통의 가치관에 합의함으로 공통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느 일방의 강제에 의한 공통의 기준은 이성적인 인간에게는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목적론적 윤리 방법론 특히 공리주의의 또 하나의 문제는 목적론적 방법만으로는 사람들 사이에 공평한 분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목적론적 방법론은 행위의 목적은 알려주지만, 사람들 사이의 공평성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김희수 교수는 목적론적 윤리방법론 특히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적론적 방법론이 분명히 인간의 행동 양태를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행동할 때에 올바른 행동이 될 수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익한 윤리원칙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적론적인 방법론은 완전한 윤리방법론이 아니며 여러 가지 약점을 안고 있다.
결국 목적론적 방법만으로는 적절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의무론적 윤리방법론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은 인간 행위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보편적 규범(또는 규칙) 또는 의무로 보는 윤리 이론이라고 할 것이다. 김희수 교수는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에 대하여 말하기를, “의무론적 방법론은 무엇이 윤리적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규범준수와 행위자의 의무 이행에 주목한다”고 하면서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에서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특정한 또는 보편적 규범을 준수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 즉 의무를 수행하는 행동이라고 보며, 목적을 전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궁극적인 결과도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보편적 규범 또는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으로서 행동의무론과 규범의무론을 들고 있으며, 규범의무론의 대표적인 예로서 칸트의 정언명법을 들고 있다. 프랑케나도 같은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의무론적 이론에는 행위의무론적 이론들(act-deontological theories)과 규칙의무론들(rule-deontological theories)이 있는데, 행위의무론들은 “기본적인 의무판단들은 ‘이러한 상황에 있어서 나는 마땅히 어떠어떠하게 행위해야 한다’와 같이 순수한 개별판단들이라고 주장”하며, 규칙의무론자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은 하나 이상의 규칙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규칙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우하는 보편성을 갖는다고 한다.
의무론적 윤리방법론 특히 칸트의 정언명법은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보편적 규범이나 의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인간 행위의 윤리적 기준은 보편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갖지 못한 기준은 타당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규칙이나 의무가 보편성을 가지려면, 이것이 또한 사람들 사이에 공평성(fairness)을 가져야 할 것이다. 프랑케나는 이것을 “대우의 평등”(equality of treatment)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은 인간 행위의 목적을 소홀히 한다는 점이 특히 문제이다. 김희수 교수는 의무론적 윤리방법론 특히 칸트의 정언명법의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① 이 이론은 목적이나 결과를 극단적으로 무시한다. ② 두 가지 이상의 규범들이 충돌할 때에는 어떤 것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지 못한다. ③ 철저한 의무수행의 동기가 아닌 내적 경향성에 의해서 동기화된 행위는 도덕적인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나, 오히려 내적으로 습득되어진 덕스러운 성품을 표현하는 행동이 더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④ 정언 명법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서 칸트는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따라야 할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도덕법칙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정언명법도 사실은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⑤ 칸트가 말한 도덕원칙의 보편성(정언명법)은 가역성(reversibility)에 기초해서 확립되는 것으로서 때로는 예외를 용납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비도덕적인 명령으로부터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의무 또는 규범과 목적과의 관계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점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규범을 분석해 보면, 규범에는 분명히 삶의 목적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길은 윤리적 판단에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요소가 있음을 말함으로써 윤리적 판단 곧 규범(또는 규칙)에 목적(또는 가치)의 요소가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김희수 교수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칸트의 정언명법과 규범의무론 역시 완벽한 윤리이론이 되기에는 부족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다.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의무론적 윤리방법론 역시 목적론적 윤리방법처럼 그것 자체만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는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지성인들이 인간의 행동 양태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여 연구하였다. 목적론적 윤리방법론과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은 그러한 노력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동의를 얻었으며, 나름대로 논리적 타당성을 갖고 있는 이론들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 중 어느 것도 그것 자체만으로 완벽한 논리가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나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에는 이 두 방법론과 더불어 앞으로 소개될 다른 윤리방법론들을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할 때 오히려 더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에는 어는 한 가지 방방법론에만 집착하여서 모순에 빠지거나 비합리적이며 편중된 결정을 내릴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론을 융통성 있게, 그리고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행동이나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에는 목적론적 윤리방법론과 의무론적 윤리방법론, 그리고 앞으로 소개될 다른 윤리방법론들을 융통성 있게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융통성 있게 하는 것이며, 또 “어떻게 상호보완적으로 이 이론들을 사용할 수 있는가?”인 것이다.
3. 상황윤리적 방법론
상황윤리적 방법론은 목적론적 윤리방법론과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실제적인 상황에 적합한 윤리적 판단을 위해서 상황과 행위자의 창의적인 반응을 중요시하는 윤리방법론이다. 김희수 교수는 이 방법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황윤리는 의무론적 방법론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하나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일단의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윤리방법론이다. 상황윤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각각의 상황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을 중시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 처한 행위자가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반응할 것을 강조하며, 매 상황 속에서 “아가페적인 사랑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가장 올바른 행동이며 각각의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황윤리적 방법론에서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는 각각의 상황을 잘 파악하여 그 상황에서 아가페적 사랑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윤리적 방법의 장점은 윤리적 기준의 적용에 있어서 삶의 현실 곧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아가페라는 최고의 기준에 의해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응한다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김희수 교수는 이 상황윤리적 방법론을 주장한 학자들로 존 로빈슨, 조셉 플레처, 폴 레만, 그리고 폴 램지를 들어 그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조셉 플레처의 방법론을 그의 책 『기독교윤리학』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윤리적 방법론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김희수 교수는 제임스 차일드레스의 평가를 빌어서 상황윤리적 방법론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상황윤리학자들은 계율주의에 대한 반발이 지나쳐서 도덕적 규범들의 긍정적 기능을 너무 일방적으로 무시한다. ② 원칙이나 규범들을 단순히 계몽적(illuminative)으로만 보고 규정적 또는 처방적(prescriptive)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도덕률 폐기론에 떨어지게 된다. ③ 상황윤리 중 어떤 것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완벽하지 못할 수도 있는 직관적 능력이나, 결과에 대한 합리적인 계산력 또는 통찰력을 전제로 하는데, 인간은 또한 상황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기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객관적인 원칙과 규범들이 필요하다. ④ 상황 자체가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⑤ 행동들과 상황은 몇몇 상황윤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독립적이거나 특이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유사한 상황과 행동들에는 그에 상응하는 규범을 만들어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⑥ 기독교 전통은 계율적인 것만은 아니며, 상황을 해석하고 상황에 원칙과 규범들을 적용하기 위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무 계율만 의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율 또는 규범을 너무 무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김희수 교수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지적한다. ① 광범위한 사회적 상황과 완전히 분리된 극한적 상황에서의 예외적인 행동에 너무 치중할 경우 행위자가 감당하여야 할 일반적인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② 상황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행위자가 아니라 마치 상황이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오도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로저 쉰의 말처럼 윤리란 “상황이 결정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처해 있는 행위자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희수 교수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절대주의적인 계율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제기된 상황윤리 이론은 상황의 특이성을 고려하고 창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 역시 너무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됨에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규범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고, 결국 그 자체만으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완벽한 방법론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론들을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상황윤리적 방법론도 완전한 윤리 이론이라고 할 수 없으며, 특히 여러 규범들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는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가페적인 사랑이 최고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하나 무엇이 진정한 아가페적인 사랑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희수 교수가 말한 대안으로서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론들을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도 그 구체적인 방법(어떻게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할 것인지?)을 제시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4. 응답론적 윤리 방법론
김희수 교수는 네 번째의 윤리방법론으로서 리처드 니버의 응답론적 윤리방법론을 소개하고 이것을 여러 윤리 방법론들 중에서 가장 적절한 것으로 제시한다. 김희수 교수에 의하면, 니버에게 있어서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은 유일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까지를 포함한 이웃의 행복 또는 복지를 위해 그들의 필요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니버는 인간을 이웃에게 응답하는 존재로 보며, 따라서 적절한 윤리는 항상 이웃에게 적절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웃은 크게 신과 인간과 자연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신에 대한 응답이 가장 중요하다. 그 이유는 신에 대한 응답이 다른 이웃들에 대한 응답의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신을 믿느냐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인간은 그가 믿는 신에 대한 신앙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한한 신을 믿고 섬기는 다신론적(polytheistic) 신앙과 단일신론적(henotheistic) 신앙은 인간을 분열과 파괴와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무한하시며 유일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론적(monotheistic) 전적인 신앙(radical faith)은 인간을 화해와 회복과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과 만물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이 오늘 이 순간에 이곳에서 하시는 일인, 만물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일 곧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웃 곧 만물의 구원과 생명을 위하여 이웃의 필요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윤리는 살아있는 윤리 곧 생명을 살리는 윤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니버의 응답론적 윤리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에 기초한, 화해와 회복과 생명을 살리는 윤리로서 기독교적인 윤리에 적합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남아 있는 문제는 ① 전적인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어떻게 전적인 신앙과 그 윤리에로 인도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② 우리가 이 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 여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여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분별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③ 이 응답론적 윤리 방법론은 앞에서 말한 목적론적 윤리방법론과 의무론적 윤리방법론, 그리고 상황윤리적 방법론과는 어떻게 다르며,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김희수 교수는 그의 책 『기독교윤리학의 이론과 방법론』에서 전통적인 윤리방법론들이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들을 잘 제시하고, 그 장단점들을 잘 비교 검토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각 이론들의 검토에서 보았듯이 어느 이론도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함을 보았다.
5. 기타 현대의 여러 윤리이론들
여기서는 위에서 본 이론들 외에 현대의 몇 대표적인 윤리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현대의 많은 윤리학자들 중 프랑케나, 김태길, 노르만 가이슬러, 그리고 롤스의 견해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프랑케나는 현대의 대표적인 규범윤리학자 중의 하나이며, 김태길은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윤리학자 중의 하나이고, 노르만 가이슬러는 현대의 대표적인 기독교윤리학자 중의 하나이며, 롤스는 20세기 대표적인 정의론자 중의 하나이다.
가. 프랑케나: 프랑케나는 그의 책 『윤리학』에서 윤리적 판단의 기준에 대해서 의무론적 이론들과 목적론적 이론들을 검토한 후 도덕적 의무판단의 원칙으로서 “선행의 원칙”과 “정의의 원칙”이 최고의 원칙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윤리적 규칙들은 이 중 어느 하나 또는 이 둘의 결합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선행(beneficence)의 원칙이란 선을 행하고 악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우리는 해나 악(나쁜 것)을 가해서는 안 된다.
(2) 우리는 해나 악을 방지해야 한다.
(3) 우리는 악을 제거해야 한다.
(4) 우리는 선을 행하고 증진해야 한다.
다음에 정의(justice)의 원칙은 개인들 간의 상대적 처우(comparative treatment)의 문제로서 “대우의 평등”(equality of treatment)을 말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여 그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이란 평등의 원칙으로서 여기서 평등은 단순한 산술적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적 평등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 정의의 원칙은 평등의 원칙 또는 공평의 원칙이라고 할 것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인간의 의무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 기준은 선행과 평등 또는 공평이라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서 이 두 가지 기준이 인간의 덕성 판단에도 적용되어 덕성판단의 최고의 기준은 선의(benevolence)와 정의(justice)라고 한다. 덕성판단은 사람의 인격에 대한 판단이므로 선행 대신 선의가 기준이 되며, 또한 평등으로서의 정의(justice)는 영어에 인격에 관하여 이에 대응하는 다른 용어가 없으므로 같은 말 곧 정의(justice)란 말을 쓴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프랑케나는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최종적인 기준은 선과 평등(또는 공평)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의무의 두 원칙(선행과 정의)이 서로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없으며, 다만 우리가 명료한 사고를 하고 적절한 모든 것을 알게 될 경우 이러한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로스가 말한 ‘식견’(perception)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 두 원칙의 적용에 있어서는 이 두 원칙 외에 관습과 법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모든 아이들의 학비가 아니라 먼저 내 아이의 학비를 부담해야 하는 것은 내 가족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는 가족제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케나는 이러한 관습과 법은 이 두 의무의 원칙과 별개의 또 다른 원칙이 아니라 단지 이 두 원칙들에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 연구자가 보기에 이러한 관습 또는 제도는 그 자체가 의무의 두 원칙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규칙인 것이다. 특히 이 경우에 관습 또는 제도는 사물의 이치에 근거해서 공평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선행과 공평의 원칙 외에 사물의 이치 곧 진리의 원칙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김태길: 현대 한국에 있어서 윤리학 연구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김태길 교수는 그의 책 『윤리학』에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윤리이론들을 소개하고, 그 각 이론들의 장단점을 고찰한 후, 윤리적 판단 기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윤리적 판단의 용어로는 “좋다”, “옳다”, “해야 한다” 등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가치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는 서술적 의미와 규정적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그는 윤리적 판단의 정당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윤리적 판단의 서술적 의미는 경험적,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증명이 가능하나, 규정적 의미는 이것은 일종의 말하는 사람의 태도 표명이므로 증명은 불가능하고, 다만 정당화는 가능한데, 정당화는 “반성적인 지성인이 사실상 거부할 수 없는 윤리의 기본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 정당성을 가진 객관적 윤리적 판단 기준이 어떻게 가능한가? 윤리적 판단 기준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각 개인의 개성과 환경 곧 각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공동의 사회에서는 공통의 인간성에 기초하여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질 것이며,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사실에 대한 소견이 일치해야 하고, 각 개인의 개성과 사회 문화적 환경에 있어서의 차이를 제거하고 공통점을 찾는 것이 필요하며, 논리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비교평가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데, 이에는 최고선을 제시하는 법, 최고 규범을 제시하는 법, 또는 논리의 일관성을 통해서 그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다시 견해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김태길은 “윤리판단의 근본 원리”란 논문에서 윤리판단 또는 도덕판단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판단은 욕망의 대립 내지 갈등을 바탕으로 삼고 수시로 일어나는 바 “어떻게 해야 옳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내려지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은 판단자가 당면한 그 문제적 상황에 있어서만 적절한 판단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성질이 근본적으로 같은 모든 경우에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타당성을 가진 판단으로서 주어진다. 그런데 주어진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은 서로 엇갈리는 경우가 많은 까닭에, 여기 어떠한 도덕 판단이 가장 옳은 판단이냐 하는 물음이 윤리학의 기본문제의 하나로서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그는 도덕판단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해야 옳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내려지는 판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위해서는 그러한 판단을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옳고 그름의 기준(곧 옳고 그름의 이유)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사실 판단에 속한 것이요, 또 하나는 가치판단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사실 판단에 속한 것은 경험적,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그 진위가 밝혀질 수 있지만, 가치판단에 속한 것은 이러한 방법으로 그 진위가 밝혀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가치판단은 결국 어떤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의 표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궁극적 가치판단이 어떻게 정당성을 가진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가치판단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첫째는 그것이 논리의 일관성과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의 일관성이 필요한 것은 논리의 일관성은 모든 학문적 논의의 기본 요청이기 때문이고, 보편성이 필요한 것은 도덕 판단 자체가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성을 가지려면, 모든 사람 또는 거의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쉽지 않다. 김태길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① 평가를 받은 대상에 관련된 사실 들에 대한 인식의 차이, ② 평가자의 이해관계 및 불공정한 배려, ③ 바람직한 인간상 또는 사회상에 대한 이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사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무한히 좁힐 수 있고, 불공정한 배려는 그것을 배제하면 되는 것이고, 문제는 결국 인간 또는 인간 사회에 대한 이상의 대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인간 또는 인간 사회에 대한 이상의 차이는 곧 가치관의 차이라고 할 것인데, 결국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가치관이 무엇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김태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러므로 어떤 원리가 올바른 인류의 이상으로서 타당성을 가지려면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공평하게 존중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도 일종의 동물인 까닭에 기본생활의 유지를 떠나서 행복할 수 없으며, 또 지성이 높은 동물인 까닭에 문화적 가치 내지 정신적 가치의 실현을 떠나서도 행복할 수가 없다. 결국 모든 사람들의 기본생활이 보장되고 그 기본생활의 토대 위에서 각자의 소질을 개발하여 모든 사람이 문화적 가치 내지 정신적 가치의 창조에 고루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함이 인류의 이상이 아닐 수 없다는 결론으로 접근하게 된다.
결국 그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생활이 보장되고 그 기본생활의 토대 위에서 각자의 소질을 개발하여 모든 사람이 문화적 가치 내지 정신적 가치의 창조에 고루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함”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인간사회에 대한 이상 또는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을 분석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이상은 곧 공평한 행복 곧 공평성과 선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이상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또 의견의 대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이러한 의견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견의 대립은 과학의 발전과 문화의 교류 등으로 점차 해소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본생활의 개념과 문화적 가치의 바람직한 체계에 대한 의견이 하나의 일치된 신념을 향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지성적 대화와 반성 그리고 상호 설득을 통하여 서로의 견해 사이의 거리를 점점 좁히는 일일 따름이며, 그 거리를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다는 이론적 보장은 없다.
이와 같이 김태길은 최종적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기본생활이 보장되고 그 기본생활의 토대 위에서 각자의 소질을 개발하여 모든 사람이 문화적 가치 내지 정신적 가치의 창조에 고루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함”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기본 내용은 곧 사람들 사이의 공평한 행복 곧 공평성과 선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는바, 그러한 차이는 “지성적 대화와 반성 그리고 상호 설득을 통하여” 그 거리를 좁혀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김태길은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의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판단은 경험적,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진리의 문제이고, 가치 판단은 곧 인류의 이상에 대한 태도 표명으로서 선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선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보편성 또는 공평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태길은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진리성, 선, 공평성을 다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세 가지를 잘 정리해서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다. 노르만 가이슬러: 가이슬러는 그의 책 『기독교윤리학』에서 여섯 가지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비교 검토하고 있다. 가이슬러는 윤리적 기준에 대한 이론으로서 도덕률폐기론(Antinomianism), 일반주의(Generalism), 상황주의(Situationism), 무조건적 절대주의(Unqualified Absolutism), 상충적 절대주의(Conflicting Absolutism), 차등적 절대주의(Graded Absolutism)가 있음을 말하고, 그 중에서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가장 적절한 이론은 차등적 절대주의라고 한다. 도덕률폐기론은 아무런 도덕법도 없다는 것이고, 일반주의는 “몇 가지 일반적인 법이 존재하지만 절대적인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황주의는 단 하나의 절대불변의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무조건적 절대주의는 “절대로 서로 충돌하지 않는 절대불변의 기준들이 많다.”는 것이다. 상충적 절대주의는 “때때로 절대불변의 기준들은 서로 충돌한다. 그리고 그 절대불변의 기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불순종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한다. 그리고 차등적 절대주의는 “때때로 절대불변의 기준들은 서로 충돌한다. 이 경우에는 더 높은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한다. 가이슬러는 그의 책에서 각 이론들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결국 차등적 절대주의가 가장 적절한 기독교윤리 이론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차등적 절대주의는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한 다수의 절대적인 도덕법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세상에서는 그들 사이에 충돌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비록 절대적인 도덕법들이라도 그들 사이에 차등이 있으므로 더 높은 수준의 기준에 따르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도덕법을 따르기 위해 보다 덜 중요한 도덕법을 어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잘못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충적 절대주의에서는 절대적 도덕법들이 서로 충돌할 때, 덜 중요한 법을 어겨야 하며, 그럴지라도 그것은 법을 어긴 죄이므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충적 절대주의와 차등적 절대주의는 절대적 법칙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 결과적으로 동일한 행위를 선택하게 되지만, 두 개의 도덕법 중 하나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상충적 절대주의는 죄로 보고 이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고, 차등적 절대주의는 이는 어차피 지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가이슬러와 같이 차등적 절대주의가 적절한 이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도덕법들 사이에도 차등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는 보다 더 중요한 도덕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타당한 것은 도덕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덜 중요한 선보다 더 중요한 선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법들 사이에 차등이 있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선들 사이에 차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라. 존 롤스: 존 롤스는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정의론자 중의 하나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정의의 원칙을 제시했다.
· 제1원칙: 각 개인은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온전한 체계에 대해 양보할 수 없는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 체계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의 동일한 체계와 양립 가능해야 한다.
· 제2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 번째는 불평등이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하에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 직무와 직위에 관계되어 있을 것, 두 번째는 불평등이 사회에서 가장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최대의 혜택과 연계되어 있을 것.
롤스는 정의의 제1원칙에서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우선성을 말하는데, 여기서 자유는 선 또는 행복을 추구할 자유로서 곧 선의 요소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각 사람에게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은 평등 또는 공평의 원리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제2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조건을 말하는데, 첫째는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하에서 직무와 직위에 개방되어 있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사회에서 가장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갈 경우임을 말한다. 이 제2원칙은 둘 다 공평의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각 사람에게 자기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하에서이며, 또한 타인에게 특히 사회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에게 부당한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공평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롤스도 선의 요소와 공평의 요소를 정의의 가장 중요한 기본 요소로 보았다고 할 것이다.
6. 성서가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
성서가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여러 가지로 말해지고 있다. 때로는 거룩(벧전 1:14-16 등), 의(마 5:6,10 등), 선(롬 2:6-7; 엡 5:8-9 등 참조) 등으로 말해지고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마 4:4 등), 율법(롬 2:12 등), 계명(마 19:17 등), 진리(요 8:31-32 등), 하나님의 뜻(롬 12:1-2; 엡 5:17 등 참조), 사랑(요 13:34-35 등) 등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윤리적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그 중에서도 율법에 표현되어 있고, 율법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율법의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는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막 12:28-31; 눅 10:25-28 참조).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들에서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그는 로마서 13:8-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는 또한 갈 5:13-15에서도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와 같이 성경은 인간의 윤리적 삶의 기준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으나 그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우리의 현실의 삶에서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이다.
그러면 이 사랑의 계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성서에서 사랑한다(아가파오)는 것은 상대방을 귀중히 여기고 섬기는 것이요(마 6:24; 갈 5:13-15 등 참조), 상대방의 유익(선)을 추구하는 것이다(고전 13:5; 로마서 13:8-10 등 참조). 그러므로 이 계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고 믿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유익(선)을 구하겠는가?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마 6:9-10 등 참조).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유익(선)을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35; 요일 3:23; 요일 4:11 등).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의 계명은 이웃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요일 4:20-21 등 참조). 다만 그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 것과 같은 사랑으로서 이웃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선을 행하는 것이다(요일 4:10 등 참조).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웃의 유익 곧 선을 추구하되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하여 이웃의 행복 곧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이란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때로는 물질적인 것, 또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먼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지 않고는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으므로 내 자신이 먼저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내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고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마 6:33; 7:7-8 등 참조).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주어진 분량대로 각자에게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마 25:14-30 등 참조).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윤리적 기준인 사랑은 결국 인간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되, 자기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웃이란 가까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우선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자에게로부터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깝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특히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자 중 필요가 큰 자로부터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가장 사랑하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또한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발견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첫째는 사랑으로서의 선이요, 다음엔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곧 공평의 원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선은 진리에 기초해야 하므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첫째 진리요, 다음에 선이요, 그리고 공평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선 중에도 차등이 있으므로 더 큰 선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이며, 같은 선일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선을 공평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선들에 차등이 있는 경우에는 더 중요한 선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은 생명이라고 할 것이다.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기 때문이다(마 16:26 등 참조). 물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생명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생명 곧 영생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요 3:16; 롬 6:23 등).
7. 종합평가 및 대안
이상으로 대표적인 네 가지 윤리이론들과 현대의 윤리이론들 그리고 성서가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느 윤리이론도 그 이론만으로는 완전한 윤리이론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을 보았다. 그러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앞에서 논의한 것들을 기초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목적론적 윤리방법론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먼저 인간 삶의 목적에서 그 기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삶의 목적에 어긋난 행위는 결코 옳은 행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선(善) 또는 행복(幸福)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행복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행복인가는 각 사람의 세계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 또는 행복은 결국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 또는 유익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선 또는 행복은 다른 말로 가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선 또는 행복에 대한 견해를 가치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윤리적 판단의 일차적 기준은 선 또는 가치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가치관은 세계관에 따라 결정되는데, 세계관은 이 세계에 대한 이해 또는 견해로서, 이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각 개인의 경험과 지식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말로 진리의 문제라고도 할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삶의 또 하나의 기준은 사물의 이치 또는 참된 이치로서의 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세계관이 다르듯이 진리에 대한 견해가 사람에 따라 다르므로 윤리적 판단의 기준도 달라질 수 있으나, 사람들 사이에 많은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세계관 또는 진리에 대한 견해의 일치를 꾀함으로 윤리적 판단의 기준에 대한 일치도 최대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적론적 윤리 방법론의 문제는 이 방법론만 가지고는 사람들 사이에 공평한 분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2. 의무론적 윤리방법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윤리적 기준은 보편성 또는 공평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윤리적 기준은 사람들 사이에 보편성을 가져야 하며, 또한 공평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은 이 점을 제시하고 있어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평성은 프랑케나가 말한 것과 같은 비례적 평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무론적 윤리방법론의 문제는 인간 삶의 목적을 소홀히 하고 있는 점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3. 상황윤리적 방법론에서 배워야 할 것은 윤리적 삶의 현실 또는 상황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고 있는 점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현실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도 하나의 중요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진리성의 기준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진리성에는 참된 이치로서의 진리와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로서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이해만으로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응답론적 윤리방법에서 배워야 할 것은 기독교신앙의 차원에서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에 응답하고자 하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법을 적절히 말해주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국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행위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과 사람들 사이의 공평성 등에 기초하여 발견해야 할 것이다.
5. 프랑케나에게서 배우는 것은 그가 선행과 공평의 원칙을 의무판단의 최종적 기준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곧 선과 공평성이 윤리적 판단의 두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사물의 이치 곧 진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암시하나 이를 분명히 말하지 못한 점이 있다.
6. 김태길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윤리적 판단에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요소가 있으며, 특히 가치판단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곧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보편성 또는 공평성을 가져야 함을 제시함으로써 진리성과 선의 요소와 공평성을 다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이 세 가지가 윤리적 판단 기준으로서 핵심적인 요소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고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였다.
7. 가이슬러에게서 배우는 것은 여러 도덕법들이 충돌할 경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법칙들도 차등이 있는 것이며, 그 차등에 의해 더 중요한 도덕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덕법들에 차등이 있다는 것은 결국 각 도덕법들이 추구하는 선의 내용들 사이의 차등이다. 이것은 결국 도덕법들의 주요 목적은 선을 도모하는데 있으며, 그 추구하는 선들 사이의 차등에 의해서 도덕법들의 우선순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8. 롤스의 정의의 원칙에서 배우는 것은 결국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선과 공평성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9. 성서의 교훈에서도 우리는 앞에서 제시된 여러 윤리적 판단의 원리들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성서가 가르치는 최고의 기준은 사랑의 두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선과 공평성의 원리를 보았고, 또한 이러한 선은 진리에 기초해야 하며, 곧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하며, 또 그 선의 구체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임을 보았다.
이상의 논의에서 볼 때 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꼭 필요한 요소는 ① 첫째 서술적 측면에 있어서의 진리성이요, ② 다음에 인간의 이상으로서의 선이 있어야 함이요, 그리고 ③ 사람들 사이에 공평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진리성, 선, 그리고 공평성이라고 할 것이다. 곧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 되려면, 최소한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그 행위(또는 규범)는 옳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성 또는 진리됨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참된 이치로서의 진리성으로서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참된 이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실로서의 진리성으로서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사실 또는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이란 어떤 행위의 목적으로서 그것이 인간에게 선 또는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평성은 어떤 행위가 여러 사람에게 관련될 경우에 그 행위는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선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평성은 프랑케나가 말한 바와 같이 비례적 평등으로서의 공평성이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옳은 것이 되려면, 첫째는 참된 이치 또는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로서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다음에 사람들에게 유익 또는 선을 가져오는 것이어야 하고, 또한 관련된 사람들에게 선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제시함에 있어서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 기준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왜냐 하면, 진리, 선, 또는 공평성에 대한 이해는 각 사람의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회 또는 공동체에 있어서는 그 기준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각 구성원들마다 그들이 가진 세계관, 가치관이 다르므로 모든 구성원들이 일치되는 기준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나, 대신 구성원들 서로간의 많은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공통의 세계관, 가치관을 만들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공통의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행위에 있어서 적용되어야 할 규범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어느 규범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 때는 가이슬러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차등적 절대주의의 방법을 따라 각 규범이 추구하는 선의 내용을 비교해 보고 더 중요한 선을 추구하는 규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한 사람 또는 한 공동체에게 있어서 선과 의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이것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의무는 그 자체가 어떤 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 또는 목적이 더 중요하냐? 의무가 더 중요하냐가 아니라 의무는 무엇을 위한 의무인가를 분별하여 그 의무가 추구하는 선과, 한 개인 또는 한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 또는 선을 비교하여 그 중 더 중요한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고려할 것은 개인의 선과 집단의 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할 때에 이것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일반적으로는 집단의 선이 더 중요하겠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때에 따라서는 한 개인의 선이 어느 집단의 선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의 생명은 어느 집단의 많은 재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문제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는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매 사례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선 또는 가치인가를 분별하여 더 중요한 선 또는 가치를 선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여러 선들 사이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그것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한 집단 또는 한 사회 속에서는 그것은 공동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회 또는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많은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합의 된 공동의 가치관에 따라 가치의 서열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에 가치의 서열과 공평성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한 개인에게 있어서나 한 사회에서나 선이 우선이라고 할 것이다. 행위의 목적이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평성 또한 동시에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선과 공평성은 우열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가지 이상의 선 중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에는 보다 더 큰 선을 선택해야 할 것이며, 여러 사람의 선이 관련된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선이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공평하다는 것은 단순히 산술적인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합당하게 곧 각 사람의 자격에 비례해서 선을 분배하는 것을 말한다.
결론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꼭 필요한 요소는 ① 진리성, ② 가치 또는 인간의 이상으로서의 선, 그리고 ③ 공평성이 있어야 함을 보았다.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 되려면, 그것이 최소한 이 세 가지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성 또는 진리됨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참된 이치로서의 진리성으로서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참된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실로서의 진리성으로서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사실 또는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이란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의 목적으로서 그것이 인간에게 선 또는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평성은 어떤 행위가 여러 사람에게 관련될 경우에 그 행위는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선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옳은 것이 되려면, 첫째는 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다음에 사람들에게 선을 가져오는 것이어야 하고, 또한 관련된 사람들에게 선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제시함에 있어서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 기준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 또는 공동체에 있어서 그 기준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각 구성원들마다 그들이 가진 세계관, 가치관이 다르므로 그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세계관 가치관의 일치를 꾀하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공통의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행위에 있어서 규범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가이슬러가 제시한 바와 같이 차등적 절대주의의 방법을 따라 각 규범이 추구하는 선의 내용을 비교해 보고, 그 중 더 중요한 선을 추구하는 규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선과 의무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의무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 또는 목적과 의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결정하고자 할 때는, 그 의무가 추구하는 선과, 한 개인 또는 집단이 추구하는 목적 또는 선을 비교하여 그 중 더 중요한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개인의 선과 집단의 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할 때에 이것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일반적으로는 집단의 선이 더 중요하겠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왜냐 하면, 때에 따라서는 개인의 선이 집단의 선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의 생명은 집단의 많은 재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 또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고 매 사례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선 또는 가치인가를 분별하여 그 중 더 중요한 선 또는 가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선들 사이에 있어서의 우선순위는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한 사회 또는 공동체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므로 구성원들 사이에 많은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공동의 합의를 이루고 그 합의에 의해 선 또는 가치의 서열을 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치와 공평성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인 측면에서나 사회적인 측면에서나 가치가 우선이겠으나, 공평성 또한 동시에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가치와 공평성은 우열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여러 사람의 선이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 여기서 공평하다는 것은 단순히 산술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합당하게 곧 각 사람의 자격에 비례해서 선을 분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제시된 진리성, 선, 공평성의 기준들은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 어떤 행위 또는 규범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요건들로서, 이 기준들을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함에 있어서는 각 사례마다 무엇이 그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이고, 무엇이 참된 이치에 맞는 것이며, 무엇이 인간에게 더 큰 선 또는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며, 또 무엇이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공평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 기준에 대한 하나의 시험적 연구로서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최소한 진리성, 선, 공평성이 필요함을 보았다. 여기에 제시된 기준들을 기초로 인간 삶의 윤리적 판단 기준에 대한 보다 더 심층적인 연구가 계속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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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Criteria of Ethical Judgments of Human Life
Choi, Yeong-Tae
The criteria of ethical judgments of human life are the criteria of judgments on the right and wrong or the goodness and badness of human behavior or personality, and they become the criteria of choice of an action utilized when we try to do an action. Therefore there have been many discussions on what will be the true criteria of ethical judgments of human life, and the representative theories about them are the Teleological Ethical Method, the Deontological Ethical Method, the Situational Ethical Method, and the Responsible Ethical Method. However, none of those methods are satisfactory enough to give absolute criteria for ethical judgments. Therefore, this thesis investigates those four ethical theories and the ethical theories of contemporary distinctive ethicists (Frankena, Kim Taegil, Geisler, and Rawls) along with the ethical criteria of the Bible, and tries to find a better criterion, which is desirable and adequate for more people.
From this investigation this thesis found that there are three essential criteria of ethical judgments of human life: ① truth as principles of things or right understanding of affairs, ② 'good' as the ideal of a human being or as the one beneficial to human beings, and ③ fairness as proportionate equality. This means that if an action or a rule would become a 'right' action or rule, it should have at least these three elements in it. In a person his or her ethical criteria will be made by his or her worldview and view of value, and in a society or a community the ethical criteria will be made by the mutual agreement of its members through dialogue and persuasion among themselves. When the rules contradict each other in doing an action, the more important rules should be observed through comparing the goods(outcomes) which are pursued by the rules as in the Graded Absolutism of Norman Geisler. However, not all the problems will be solved by these three ethical criteria (truth, goodness, fairness), which are presented in this thesis, because even if these three elements are presented, there should be continual inquiries and discussions about what is truth, what is good, and what is fairness in a more concrete sense in each case.
Key Words: Criterion of Ethical Judgment, Truth, Goodness, Fairness, Ethical Theory, Worldview, View of Va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