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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랍철학 - 플라톤
    인문학과 철학 2014. 8. 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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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플라톤은(BC 428-348)은, 그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 놓은 질문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의 해답으로 “이데아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이데아론은 본격적인 의미에서 서양철학을 출발시키게 되었다.
     
     1. 생애

     플라톤은 기원전 428년에 아테네 또는 아에기나에서 태어났다. 출생지가 혹시 아에기나라 할지라도, 그의 양친은 곧 케피소스 장원으로 되돌아온 것 같다. 케피소스의 장원은 아테네의 성곽에서 서북쪽으로 1Km떨어진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플라톤은 이곳에서 자랐다. 또 훗날 이곳에 그의 학교 아카데미아를 세웠고, 그리고 결국 그는 이곳에 묻혔다.

     

     플라톤의 양친은 모두가 아테네에서는 유명한 귀족집안(정치가 집안)이었다. 플라톤의 본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였는데, 그의 어깨가 넓다고 해서 플라톤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의 아버지 아리스톤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재혼했다. 사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속에서 자신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그의 편지들이 남아 있는데, 특히 일곱 번째 편지가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아테네의 명문가 출신인 플라톤은 정치가로서 성공해 보려 했었다. 그리하여 그도 소피스트들을 따라다녔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만난 플라톤은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철학에 전심하게 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열광하여 철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스무살이 되던 때였다. 따라서 그가 소크라테스와 “스승과 제자”관계를 유지한 것은 8년간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전적으로 매혹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거의 모든 저서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서술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플라톤은 세 차례에 걸쳐서 이탈리아 남쪽에 있는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스에 여행을 했다.

     

     첫째 여행(BC 390-388)은 이렇게 시작된다. 시라쿠스에는 당시 디오니시오스 1세가 권좌에 앉아 있었다. 플라톤은 디온이라는 신뢰하는 제자이자 친구의 주선으로 거기 왔고 체류기간은 이삼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결국 디오니시오스 1세와의 불화로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없게 된다. 디오니시오스의 정치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디오니시오스 1세는 플라톤이 탄 배를 아테네가 아니라 아에기나섬에 귀향토록 마련했다. 당시 아테네와 아에기나 사이는 전쟁상태여서 플라톤은 체포되어 노예 시장에 내세워졌다. 그런데 마침 카레네 출신의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는 사 주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무사히 아테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다.

     

     플라톤은 첫 번째 시칠리아 여행에서 돌아와서, 자기가 살고 있는 장원에 아카데미아를 세웠다(BC397).

     

     

     둘째 여행(BC 367)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디오니시오스 2세가 통치하게 된다. 이번에는 디온이 그를 초청했다. 그런데 플라톤이 그곳에 도착한 얼마 후에 디온이 디오니시오스 2세에 의해서 추방된다. 그리하여 플라톤도 그곳을 떠나게 된다.

     

     셋째 여행(BC 361-360)도 불행하게 끝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디오니시오스 2세가 프라톤을 초청한다. 플라톤은 오랜 주저 끝에 그의 초청에 응한다. 처음에는 그들 사이가 원만했으나, 곧 폭정에 항거하기 시작한 플라톤은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 후 디온은 군사를 일으켜 디오니시오스 2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디온 자신고 폭정을 하다가 결국에는 암살되고 만다.
     플라톤이 세 차례에 걸쳐서 시라쿠스를 방문한 것은 첫째로 그의 정치적 이상을 펴보고 싶어서였고, 둘째로 디온과의 우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라쿠스의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없었다.

     

     플라톤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348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플라톤은 서른 여섯 개의 대화편을 남겼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개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의 대화편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프로타고라스」등이 있다.
     후기의 대화편에는 「심포지움」(잔치),「파이돈」,「국가론」,「법률」,「티마이오스」등이 있다. 그리고 몇 개의 편지도 전해지고 있다.

      2. 사상

     플라톤의 사상은 결국 그의 “이데아론”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이데아론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플라톤에게 처음부터, 무엇이 “생각해 볼만 한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생각해 보아야할만할 것”인가 하는 것이 뚜렷했다.

     

     “옳은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선한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참된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바로 “생각해 볼만 한 것”이었다.

     

     그의 스승이던 소크라테스에게는 인간이 힘써 추구해야 될 것은 명백히 그리고 자명하게 “옳은 것”, “선한 것”, “참된 것” 등이었다. 그러나 “옳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옳은 것”, 그것이 왜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 그것이 왜 옳지 않은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토대로 해서 그리고 무엇을 척도로 해서 우리는 그렇게 판단하고 그리고 또한 그렇게 말하는 가? 그에 대한 대답을 소크라테스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답을 못한 채 죽고 말았다.

     ① 이데아론

     그리하여 플라톤은, 스승의 질문을 이어받아 자신이 그 질문을 계속 질문해 나갔다.
     “선한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선한 것”, 그것은 도대체 왜 그것이 선한 것이며, 선하지 않은 것, 그것은 도대체 왜 그것이 선하지 않은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토대로 해서 그리고 무엇을 척도로 해서 우리는 그렇게 판단하고 또한 그렇게 말하는가?

     

     “참된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참된 것”, 그것은 도대체 왜 참된 것이며, 거짓된 것, 그것은 도대체 왜 그것이 거짓된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토대로 해서 그리고 무엇을 척도로 해서 우리는 마음 놓고 그렇게 판단하고, 그리고 또한 그렇게 말하는가? 

     

     “아름다운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 그것은 도대체 왜 아름다운 것이며, “아름답지 못한 것”, 그것은 도대체 왜 아름답지 못한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토대로 해서 그리고 무엇을 척도로 해서 우리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렇게 판단하고 그리고 또한 그렇게 말하는가?

     

     질문을 거듭하다가, 생각을 거듭하다가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착상을 하게 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어디엔가 “선한 것”그 자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얻어 만나는 선한 것들은 그들이 “선한 것”자체에 한“몫”을 차지함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도대체 선한 것들인 이유는 그들이 “선한 것”자체에 한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선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선한 것” 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것이 “더” 선한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선한 것” 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덜 선한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선한 것”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작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에 의하면, 어디엔가 “참된 것”자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얻어 만나는 “참된 것”들은, 그들이 “참된 것”자체에 한몫을 차지함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도대체 참된 것들인 이유는 그들이 “참된 것”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참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참된 것”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것이 “더” 참된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참된 것”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덜” 참된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참된 것” 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작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에 의하며, 어디엔가 “아름다운 것” 자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얻어 만나는 아름다운 것들은, 그들이 “아름다운 것”자체에 한 몫을 차지함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도대체 아름다운 것들인 이유는 그들이 “아름다운 것” 자체에 한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 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덜”이름다운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작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플라톤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적용한다.
     그리하여 플라톤에 의하면, 어디엔가 “돌멩이” 자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얻어 만나는 돌멩이들은, 그들이 “돌멩이” 자체에 한몫을 차지함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도대체 돌멩이인 이유는, 그들이 “돌멩이” 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돌멩이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돌멩이”자체에 한몫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돌멩이가 “더” 돌멩이다운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돌멩이”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돌멩이가 “덜”돌멩이답게 되는 이유는, 그 돌멩이가 “돌멩이”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작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에 의하면, 어디엔가 “나무”자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얻어 만나는 나무들은, 그들이 “나무” 자체에 한몫을 차지함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두 대체 나무인 이유는, 그들이 “나무” 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나무가 아닌 이유는, 그들이 “나무”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나무가 “더”나무다운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나무” 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나무가 “덜” 나무다운 것이 되는 이유는, 그 나무가 “나무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작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플라톤에 의하면, 어디엔가 “사람”자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얻어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람” 자체에 한 몫을 차지함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도대체 사람인 이유는, 그들이 “사람” 자체에 한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사람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사람” 자체에 한몫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사람” 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사람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사람” 자체에 차지하는 몫이 “더” 작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얻어 만나는 “현실의 세계” 이외에도 “그것 자체의 세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게 된다. 이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그것 자체의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이러한 이데아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내기 위하여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들고 있다.

     

     사람들이 땅 속의 동굴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은 어릴 때부터 동굴 안의 벽을 향해 손발과 목까지 꽁꽁 묶여 있다. 따라서 그들은 동굴 안의 벽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손발과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목을 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뒤쪽 굴 밖에 멀리 태양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태양 사이에는 높다랗게 하나의 길이 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물건이나 동물들을 이 길을 따라 운반하고 있다. 그러나 동굴 속에 있는 사람들은 동굴 안의 벽에 비치는 이 사물들, 짐승들, 그리고 사람들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 그림자가 모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을 풀어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동굴 밖으로 나와서, 처음에는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다가 차차 사물들, 동물들 그리고 사람들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빛나는 태양까지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기뻐하며 한 없이 행복해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동료들을 가엾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동굴로 다시 내려갈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들을 풀어 주고 그들을 지상으로 이끌어내려고 한다면, 그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그 사람을 죽여 버릴 것이다.                  
     이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의 세상은 “현실의 세계”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 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리고 동굴 밖 세상은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참된 세계이며, “현실의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이데아의 세계”는 하나의 “원형의 세계”이며, “현실의 세계”는 하나의 “모형의 세계”이다. 따라서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의 세계”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에 의하면 이러한 “이데아의 세계”에는 “선한 것” 자체라는 이데아가 있는데, 이것은 이데아 중의 이데아이다. 그리고 이 “선한 것” 자체라는 이데아는 다른 모든 이데아들에게 그 존재와 본질을 부여해 주는 그러한 이데아이다.
     
    ② 영혼론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데아들을 직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혼이  감옥과 같은 육체에 갇혀 있다. 그리하여 육체는 영혼에게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이 현실의 세계 속에서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영혼은 눈앞에 있는 그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통해서 “그 사물 자체”, 즉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그 사물 자체”를 상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에 의하면, 철학자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육체에서 해방시키려는 사람이다.

     

     “선한 것”자체, “옳은 것” 자체, “아름다운 것” 자체는 영혼이 육체의 방해를 받지 않을 때, 즉 육체와 분리 될 때 비로소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 철학자는 영혼을 육체에서 해방시키려고 한다.
     
    ③ 국가론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의 윤리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국가론을 그의 윤리관과 함께 살펴보겠다.

     

     국가에는 , 첫째로 식량과 그외 필수품을 생산하는 계층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나라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계층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나라 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계층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있어야 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들과 필수품을 생산해내는 수공업자들은 무엇보다도 지나친 욕심을 부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들이 힘써야 하는 것은 “절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덕행은 “절제”이다.

     

     나라를 외침으로부터 지키고 나라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위험 앞에서 겁을 먹고 도망쳐버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들이 무엇보다도 힘써야 할 것은 “용감한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이나 시련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기”이다.

     

     그리고 나라 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한쪽으로 치우치게 일을 처리할 위험이 있다. 불공평하게, 불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버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들이 무엇보다도 힘써야 할 것은 “의로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의”이다.

     

     또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배우기를 게을리하여 우둔하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 즉 왕은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것”에 힘써야 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다시 말해서 왕은 “이론”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나 지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플라톤에 의하면, 철학자가 왕이 되든가 또는 왕이 철학자여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국가론은 개별적인 인간의 행위에도 적용된다. 즉, “윤리”에도 적용된다.

     

    이간에게는 첫째로 지나친 욕심을 부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절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로 인간은 위험이나 시련 앞에서 두려워 도망친다거나 비겁하게 행동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용감한 것”이 요구된다.

     

    셋째로 인간에게는 일을 처리할 때 한쪽으로 기울어질 위험이 있다. 불공평하게 불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버릴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정의로운 것”이 필요하다. 끝으로 인간은 힘쓰지 않으면 우둔해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는 줄곧 “지혜로운 것”에 힘써야 한다.

     

     플라톤의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 서양 윤리의 네 기둥이라 일컬어지는 “사추덕”이다.

     

     플라톤에게는 처음부터 무엇이 “생각해 볼만 한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명백했다.

     

     “선한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참된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아름다운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선한 것”, 그것은 도대체 왜 그것이 선한 것인가? “선하지 않은 것”, 그것은 도대체 왜 그것이 선하지 않은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무엇은 토대로 해서 그리고 무엇을 척도로 해서 우리는 그렇게 판단하고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이런 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 그의 “이데아론”이다. 그의 사상은 이러한 이데아론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데아론은 그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열쇠가 된다.

     

     이데아란 어떤 사물의 “그것 자체”이다. 그 참된 모습이다. 그 원형이다. 한마디로, 이데아는 그 사물의 바로 “그것 자체”이다. 따라서 인간은 “현실의 세계”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이데아의 세계”를 찾아나서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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