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그는 사물에게로 다가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엄격한 의미의 학문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그는 “학문의 아버지”가 된다.
1.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트라키아(그리스의 북쪽) 지방의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아민타스 왕(알렉산더의 조부)의 궁정 시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의 학교 아카데미아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거기 머물렀다. 따라서 그는 이십년 동안 플라톤의 제자로 있었다.
그는 플라톤이 죽은 후에, 소아시아의 앗소스라는 곳으로 가서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원전 342년에 마흔둘이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열세 살이던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기 위해서 마케도니아의 궁정에 갔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아테네로 돌아와서 “리케리온”이라는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중요한 저서를 주로 이 시기에 작성했다.
사람들은 이 학교에 속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면서 철학한다고 해서 그들을 “소요학파”라고 불렀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죽어 버리자, 아테네에서는 마케도니아 궁정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마케도니아 궁정과 가까이 지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위협을 느낀 나머지 어머니의 고향인 칼키스라는 곳으로 피난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이듬해 예순둘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테레스는 자기 생애의 초기와 과도기의 저서 속에서는 아직도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리케이온 학교에서 가르치던 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담은 저서를 내놓게 된다.
그들을 열거해 보면, 「논리학」,「자연학」,「형이상학」,「영혼론」,「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등을 들 수 있다.
2.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그의 스승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시작된다. “플라톤은 친구이다. 그러나 진리는 더 큰 친구이다”라고 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논증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어떤 사물을 바로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그것 자체가 그 사물과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은 알아들을 수 없다. 어떤 사물을 바로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그것은 바로 그 사물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그 사물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리는 그 사물에게로 다가가서 그 사물로부터 그 사물의 본질을 추상하여 그 사물의 “개념”을 얻어낸다. 플라톤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데아”란 바로 이러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물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실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 개념을 얻어내야 한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우리는 “지식”을 얻어낸다. 그리고 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그것이 바로 “학문”이 된다.
이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아버지가 된다.
① 학문
아리스토테레스에 의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물”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하여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본다. 그리고 손으로 딱딱하고 부드러움을 알아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감감 자료들을 하나에로 통합해낸다. 그것을 우리는 “통각”이라 한다. 그리고는 아직도 감각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통각에 “이성”이 작용하여 그 통각을 하나의 “개념”에로 작업해낸다.
이렇게 개념(예컨대 하늘)이 생겨나게 되면, 다음단계로 우리는 개념과 개념을 결합시키거나 또는 분리시켜 “판단”(예컨대 하늘이 파랗다 또는 하늘이 파랗지 않다)을 엮어 낸다.
그리고 이때 개념과 개념을 “제대로” 결합시켰다면, 그렇게 하여 생겨난 판단은 “진리”이다. 그리고 개념과 개념을 “올바로”분리시켰다면, 그렇게 하여 생겨난 판단 역시 “진리”이다.
그런데 이때 개념과 개념을 “제대로” 결합시키지 못했다면, 그렇게 하여 생겨난 판단은 “허위”이다. 그리고 개념과 개념을 “올바로”분리시키지 못했다면, 그렇게 하여 생겨난 판단 또한 “허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렇게 하여 생겨난 “참된 판단”들은 “지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그것은 “학문”이 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아버지가 되었다.
②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있는 것”을 있다는 관점에서만 문제 삼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있는 것”을 일정한 관점에서, 예컨대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인가 또는 살아 있지 않은 것인가, 그것이 “정상적인 것”인가 또는 “물질적인 것”인가라고 하는 일정한 관점을 택하지 않고,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즉 그 있다는 관점에서 문제 삼는 그러한 학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있는 것”, “존재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예컨대, “빨갛다”는 있는 것이다. “파랗다”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둥글다”, “네모나다”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돌멩이”는 있는 것이다. “소나무”는 있는 것이다. “바둑이”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철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돌멩이”, “소나무”, “바둑이”, “철수” 등만이 본격적인 의미에서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돌멩이로서, 소나무로서, 바둑이로서 그리고 철수로서 “스스로 서있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서있다. 그리하여 이들만이 본격적인 의미에서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 “스스로 서 있는 것”들을 “실체”라고 이름 붙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실체”들만이 본격적인 의미에서 “있는 것”들이다.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빨갛다”, “파랗다”, “둥글다”, “네모나다” 등은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서 있지 못하고, 언제나 말하자면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독립한다거나 자립해서 존재하지 못한다.
“빨갛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이 빨갛다. “파랗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파랗다. “둥글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이 둥글다. 그리고 “네모나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책상”이 네모나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 “더부살이하는 것”을 “우유적인 것”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우유적인 것들은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유적인 것”들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제 그것만이 본격적인 의미에서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 “실체”란 무엇인가? 그 실체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느 말하기를, 실체란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석상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소크라테스의 석상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이 대리석은 소크라테스의 석상을 이루는 재료이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라고 한다.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것은, 대리석으로 된 건물도 아니고 대리석으로 쌓은 성벽도 아니다. 그것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소크라테스”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라 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은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첫째로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설”이다.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크게 분류된다.
첫째단계로, 단순히 있기만 하는 것, 즉 무기물이 있다. 둘째 단계로, 단순히 있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것, 즉 생물이라고 하는, 식물과 동물이 있다. 셋째 단계로, 있고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그러한 것, 즉 인간이 있다. 마지막 단계로 순수 정신적인 것, 즉 신들이 있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전재하는 것들은 단계별로 그 서열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있는 것”이 “저렇게 있는 것”으로 되는 사실을 경험한다. 즉, “변화”를 경험한다. “생성”, “변화”, “소멸”을 수없이 경험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묻게 된다. “변화”린 무엇인가? “ 생성”, “소멸”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왜 “이렇게”있는 것은 “이렇게” 있는 것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저렇게” 있는 것은 “저렇게” 있는 것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도대체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없는 것”이 되고 마는가? 그리고 “없는 것”은 왜 “없는 것”으로 그냥 남아 있지 않고, “있는 것”이 되는가?
이러한 질문이 너무나도 큰 질문이어서 그러한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을 축소시켜 문제 삼는다. 즉. 그는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는 변화 그리고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되는 그러한 변화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리고 다만 “이렇게” 있는 것이 “저렇게 있는 것으로 옮겨가는 변화 그리고 ”저렇게“있는 것이 ”이렇게“있는 것으로 옮겨가는 변화만을 문제 삼고 있다.
“변화”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들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하나의 변화에는 두 상태가 있게 된다. 예컨대 “사과 씨”라는 하나의 상태와 “사과나무”라는 다른 하나의 상태가 있게 된다.
여기서 만인 “사과 씨”가 “사과나무”로 옮겨간다면, 그것은 “사과 씨”가 “사과나무”로 될 수 있는 “가능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과나무”가 “사과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사과나무”가 “사과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가능한 상태”를 짧게 “가능태”라고 이름 짓는다.
다른 한편, “사과 씨”는 “사과나무”에 대해서는 아직도 “가능한 상태”에 있을 뿐이지만, “사과 씨”로서는 이미 이루어져 있는 “현실의 상태”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현실의 상태"를 짧게 ”현실태“라고 이름 짓는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변화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 때문에 “있는 것”은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둘째로, “현실태”와 “가능태”로 되어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변화라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해서 변화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가는 것은 반드시 현실태에 있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예컨대, 뜨거워질 가능성 속에 있는 나무를 현실적으로 뜨거워지게 하는 것은 나무와는 다른 불이다.
이와 같이 변화하는 것은 반드시 다른 것에 의해서 변화 한다. 그런데 이것 이 “다른 것”은 또한 “다른 것”에 의해서 변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른 것”은 한없이 그리고 무한히 소급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결국 첫 번째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는 다른것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첫 번째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스스로는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으면서도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첫 번째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한편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다루는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 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 즉 신을 문제 삼는 “신-론”이다.
③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선”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모든 사람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러나 “최고선”의 내용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각자가 의견을 달리한다.
어떤 사람은 “쾌락”이 인간의 최고선이라고 내세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재산”이 인간의 최고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한 어떤 사람은 “명예”가 인간의 최고선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견해들을 하나씩 차례로 반박해 나간다.
만일 “쾌락”이 인간의 최고선이라면, 다시 말해서 괴로운 것을 피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면, 그러한 행복은 동물들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행복일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재산”이 인간의 행복이라면, 재산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게 되는 것이어서, 인간의 행복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에게 고유한 최고선이 그리고 그 행복이 이렇게 우연에만 매여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리도 또한 만일 “명예”가 인간에게 고유한 행복이라면, 명예는 다른 사람이 내게 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달려있는 것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내 행복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남의 손에 달려있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스스로 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최고선은 그리고 인간의 행복은 진리를 명상하는 것이다. 진리를 명상하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걸맞은 최고선이며, 그 고유한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6세기부터 자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고대의 사상을 종합한 그러한 사상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