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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존철학-싸르트르의 실존
    인문학과 철학 2014. 8. 2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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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싸르트르의 실존



    싸르트르(1905-1980)는 인간실존의 ‘우연성’‘무상성’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하게 파헤쳐 놓았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금세기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철학을 하라, 그리고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小說을 써라”라고 할 만큼 소설을 가지고 철학을 한 사람이다. 싸르트르의 사상은 제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해서 제 1기와 제 2기로 구분된다. 그의 사상은 제 1기에서는 개인주의적 특성이 들어나고 제 2기에서는 사회주의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1960년 『변증법적 이성의 비판』이후로 싸르트르는 완전히 공산주의자가 된다. 싸르트르는 그 후기사상에서 마르크스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는 또한 전기사상 곧 실존사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이 둘을 조화해 보려 했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조화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존사상을 그 소설작품들 『구토』,『파리떼』,『닫힌문』을 중심으로 자세하게 피력하고 있다.


    싸르트르는 人間을 문제 삼는다. 일반적인 그리고 추상적인 인간 즉 인간의 ‘본질’을 중심으로 인간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인간 즉 ‘인간실존’을 중심으로 인간을 해명하고 있다. 싸르트르는 인간의 우연성, 무상성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우연성, 무상성을 중점테마로 하여 , 그 우연성, 무상성의 의미와 방향을 찾는 것을 그의 가치로 삼았다. 작품 『구토』는 존재현상 또는 실존의 직접적인 파악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여기서 싸르트르는 주인공 로깡땡을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묘사한다. 


    로깡땡은 “나는 혼자 산다. 나는 전적으로 혼자 산다. 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또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루는 로깡땡한테 “있다”라고 하는 것이 크게 떠올랐다. 마치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리고 그것이 비켜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내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이 그에게 부각되었다. “내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에서 더 나아가 로깡땡에게는 이 거리가 있고, 이 공원이 있으며, 이 건물이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로깡땡에게는 이 도시가 있고, 이 가로수가 “있다”, 아무것도 없지 않고 “있다”라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그런데 자신을 포함해서 그것들을 쓸데없이 있다. 


    존재할 이유 없이 그저 있다. 더 나아가 없어도 될 것이 없지 않고 있다. 없으면 더 좋았을 것이 없지 않고 있다. 로깡땡은 이렇게 존재할 이유 없이 있는 그들 앞에서, 쓸데없이 있는 그들 앞에서 먹은 것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없어도 될 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불합리한, 그리고 부조리한 사실 앞에서 싸르트르는 먹은 것이 올라온 것이다. 결국 싸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이 실존한다”라는 말은, 인간이 단순히 지금, 그리고 여기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 이렇게 던져져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싸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실존이 아무런 그리고 그 어떤 존재이유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면, 그는 자유이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존재이유가 있게 되면 “. . . 해야 한다”는 것이 동시에 주어진다. 과업이 존재이유로 주어진다. 그러나 존재이유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면 이러한 인간실존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거나 강요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고 허용되어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싸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수 없다. 이 자유를 가지고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이러한 사상을 싸르트르는 희랍신화 ࡔ아가멤논ࡕ을 테마로 삼은 드라마 ࡔ파리떼ࡕ를 통해서 말한다.


    아가멤논이 출전하고 난 다음 그의 아내가 아이기스트스를 알게 된다. 남편이 돌아오자 두 사람은 아가멤논을 환영하는 축하연에서 그를 암살해 버린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트가 변장하여 고향에 돌아온다. 그리고 아이기스트스와 어머니를 암살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이 때 제우스가 나타나 오레스트에게 뉘우치기를 권함으로써 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오레스트는 잘못이 없다고 하며 뉘우치지 않는다. 오레스트는 제우스에게 “너는 인간들의 왕이 아니다.”고 하자 제우스가 “그러면 누가 너를 만들었느냐?”고 반박한다. 


    그러나 오레스트는 “그것은 너다. 그러나 나를 自由로운 자로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제우스는 “내가 너를 만들 적에 나를 섬기라고 자유를 준 것이다”고 하자 오레스트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자유가 너를 반역한다. 나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각자가 자기의 길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 너와 나는 두 척의 배처럼 서로 접촉하지 않고 미끄러져 갈 뿐이다. 너는 신이다. 그리고 나는 자유다. 너와 나는 다 같이 단독이요 우리들의 고민도 한가지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싸르트르는 인간실존을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의미도 없이 단순히 있는 것. 그것뿐이라고 하고, 그러기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실존은 자유라고 파악했다. 다시 말해 인간실존은 아무런 관계도 없이 홀로 선 고독한 존재이고, 인간은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나, 그러나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자유로울 뿐 아니라 자유롭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싸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은 자유에로 처단 받았다. 결국 싸르트르는 『파리떼』의 주인공 오레스트의 입을 통해 “인간은 자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사람들은 “인간은 자유다”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런데 싸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것은 그 어떤 현실적인 상태가 아니다. 하나의 가능적인 상태다. 어떤 일정한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즉 하나의 ‘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이러한 인간실존은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무언가로 메꾸어 보려고 시도하게 된다. 텅 비어 있는 자기 자신, 그래서 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무언가로 가득 채워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 그 앞에 놓여 있는 일체의 것을 차지하려 한다. 아니 세계를 통째로 자기 자신이 소유하려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모든 것을 갖게 되고 일체의 것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이 소유하게 된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 텅 비어 있는 자기 자신 그리하여 “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지양하여 자기 자신이 “모든 것”, “일체의 것”“세계”가 될 수 있고,.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인간실존은 자신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극복해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싸르트르가 말하는 가지다, 차지하다, 소유하다 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는 다른 여러 행위 중에 하나인 그러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실존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자기 자신을 가득 채워 스스로 ‘모든 것’이 되려는 그리고 일체의 것이 되어 보려는 인간실존의 기본행위이다. 즉 인간실존이 그 존재를 확보해 보려는 그러한 기본행위이다.


    그러나 싸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실존의 이러한 기본행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텅 비어 있는, 그리하여 ‘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실존(자유)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일체의 것을 소유하여 스스로 모든 것, 일체의 것이 되려하는 그 기본행위는 비극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계 속에는 나 자신이라고 하는 ‘실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실존 역시 나와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실존 역시 나와 똑같이 아무 것도 아닌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자기 자신을 모든 것으로, 그리고 일체의 것으로 가득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이 실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 자신마저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놓고, 그 대상(나 자신)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싸르트르에 의하면 다른 사람, 그것은 지옥이다.


    싸르트르의 이러한 사상은 드라마 『닫힌 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방이 하나 있다. 창문도 없고 거울도 없고 초인종도 없는 방이다. 문은 밖으로부터 잠겨진 방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여다 볼 수 없고, 안에서 밖을 볼 수도 없다. 철저히 닫혀있는 방이다. 이 방에 가르생과 두 여자가 있다. 한 사람은 침대 위에, 다른 한 사람은 쇼파 위에, 또 다른 한 사람은 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앉아 있다. 이들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서로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쓸 뿐이다. 간혹 누군가가 입을 열지만 곧 다시 다물어 버린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아무도 무엇을 시작할 수 없다. 다른 두 사람이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견디다 견디다가 가르생이 “왜 밤이 오지 않느냐? 왜 어두워지지 않느냐?”고 외친다. 그러다가 가르생은 “다른 사람, 그것은 지옥이다”하고 부르짖는다.


    싸르트르에 의하면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 앞에서 고정되고 만다. 나는 타인의 눈초리 앞에서 대상화되어 버리고 만다. 싸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질투심에서나 호기심에서 또한 품행이 나빠서 문에 귀를 기울이거나 열쇠구멍으로 엿볼 정도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갑자기 나는 현관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다. 한사람이 나를 엿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내가 나의 존재 안에서 갑자기 어떤 것에 의해 얻어맞았음을, 나의 구조 안에 어떤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싸르트르에 의하면 타인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나의 자아를 엿듣는 자의 존재로 고정시켜 버린다. 


    나는 그렇게 들켜버린 것을 부끄러워하며, 타인 앞에서 나 자신을 부끄러워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이 그에 의해 고정되고 있음을 체험하며 알아챈다. 들켜버린 상황 속에서 나는 타인이 바라보는 객체일 뿐, 그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타인의 눈초리, 그것은 메두사의 눈처럼 나를 하나의 가능성에 고정시키고, 그래서 그에 의해 내게서 다른 가능성들이 거부된다. 타인의 눈초리 앞에서 나는 대상화되어버리고 만다. 싸르트르에 의하면 타인은 결국 내 세계 속에서 하나의 장애요인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눈초리”는 싸르트르에게 있어 마지막 말마디이다.


    싸르트르의 실존사상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소책자에서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싸르트르는 실존주의를 준엄한 이론 즉 엄격히 전문가나 철학자를 위한 이론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싸르트르의 실존사상에서는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 지금까지 서양을 지배해온 본질의 철학에서는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 유신론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신의 이성 속에 먼저 있었다가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싸르트르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 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에 있어서는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다음에 그 인간이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실존한다. 싸르트르는 ‘exister'에 착안하고 있고 또 여기에 끝까지 매달린다.


    실존주의가 보는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미리 정의될 수 없다. 시초에는 인간이란 아직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인가가 된다. 따라서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본질 또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어서 각자가 그 본질, 인간성을 실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생각하고 지시해 줄 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그렇기를 원하는 그대로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에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싸르트르는 여기서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 속에서 철학자인 이반이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즉,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나 허용될 것이다.” 실상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내부나 외부에 의지할 곳이 없어지며 고독해진다. 그리고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절대로 일정하고 고정된 본질이나 인간성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은 자유로우며 인간은 자유 그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고정된 본질을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그 행동을 정당하게 또는 부당하게 하여주는 가치라든지 질서를 갖지도 못한다. 그래서 싸르트르는 마침내 “인간은 자유의 선고를 받았다”는 말로써 이야기를 끝낸다.


    이러한 싸르트르의 ‘실존사상’은 오직 ‘실존’에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는 사상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바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가득 채워 보려는 그러한 ‘실존’에 끝까지 매달려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인간실존의 그러한 땀과 노력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을 스스로 직시했던 싸르트르는 결국 ‘인간이란 하나의 쓸모없는 정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문제를 다만 그 ‘실존’에 끝까지 매달리면서, 그 실존만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결국 인간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문제는 결코 인간만으로는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스칼이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인간을 한없이 뛰어 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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