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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존철학-니체철학
    인문학과 철학 2014. 8. 2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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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니체철학



    삶의 철학은 19세기말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삶의 철학은 글자 그대로 삶을 문제 삼는다. 이때 삶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생명체를 말하는 듯 하지만 내용은 인간의 생명, 다시 말해 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삶을 문제 삼는 다는 것은 일종의 반발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정신을 문제 삼았거나 물질을 문제삼아왔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이나 물질만으로도 되어 있지 않기에 인간 그것 그대로 총체적으로 ‘모두’ 같이 다룬다는 의미에서다. 이 총체적인 ‘모두’ 이것이 삶이다. 


    18세기에 계몽주의가 풍미하여 이성만을 강조하자 낭만주의는 감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 감정 뿐 아니라 의지도 있다(지, 정, 의). 결국 인간은 모두 다이다. 바로 이것을 다루는 것이 삶의 철학이다. 삶의 철학에서 대표적인 학자들은 딜타이(Wilgelm Dilthey,1833-1911)는“삶의 철학이란 삶을 순수하게 그 자체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정신 또는 물질, 또는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삶을 설명하지 않고 삶을 그 자체로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삶을 삶이란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은 바로 니체다(F. Nietzsche,1844-1900)



    1. 니체의 삶의 본질


    니체는 “삶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을 그물로 건져 올리면 잘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은 흐르고 있다. 삶은 한없이 生成, 育成되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삶은 이러하다라고 건져 올린다. 그러나 삶을 개념으로 잡아내지 말아야 한다. 삶을 일단 개념으로 고정시켜 버리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허구가 된다”고 하였다.


    1864년(20세) 니체는 본 대학에 가서 고전어를 전공하였는데, 그곳에는 세계적 명성을 가진 당대의 고전학자 리츨(F. W. Ritschl)이 있었고, 니체는 리츨에게서 철저하게 훈련되고 드디어 그의 애제자가 된다. 


    이듬해 리츨교수가 라이프즈그대학으로 옮기자 니체도 그 학교로 따라 갔다. 1869년(25세) 라이프즈그 대학 4학년 때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2권)를 헌 책방에서 발견, 구입하여 2주간 탐독하고 난 후, “나는 이 책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쇼펜하우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내게 이 책을 전해 주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니체는 “세계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전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의해서 “삶은 意志”라는 것을 작업하여 나간다. 이때쯤 바젤대학의 고전어 교수 자리가 비자 리츨이 니체를 추천에 의해서 학교 잡지에 발표했던 작품이 학위논문으로 인정되어 교수가 된다. 이후 니체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볼 때 니체는 전 생애 중 10년간은 교수로, 10년간은 저술활동을, 10년간은 정신병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서양사상사에 있어서 하나의 숙명적인 존재이다. 지금까지 유럽인들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 커다란 의문을 던진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서양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는 2500년의 서양의 형이상학의 전통역사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를 니힐리스트라고 부른다. 2500년 즉 소크라테스에서 헤겔에 이르는 역사를 부정하고 희랍적인 것에로 회귀를 외친다. 이것은 한마디로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함축된다.



    니체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주저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살펴보면 된다. 이 책을 이해하기위해서 먼저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라는 단장군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사상 전체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장은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사자가 되며, 사자가 어떻게 어린아이가 되는지를 그리고 있다. 이 셋은 니체의 전 사상을 상징해 주고 있는 중요한 비유이다.


    ① 1단계 : 낙타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짐승이다. 낙타는 짐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그리고 크고 작은 짐을 떠맡아, 아무 불평 없이 그 일을 해낸다. 그것은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모토(Moto)가 있다면 “너는 해야 한다(Du sollst)"이다. 이것은 어떤 부류의 인간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히 무겁고 엄한 율법을 지키려 한다든지, 신에게 복종하려한다든지 하면서 생의의미를 찾아가려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활하고 살아가는 동물이 하루는 모든 짐(神, 道, 德, 法)을 벗어 던지고 사막으로 도망가서 천년 묵은 용과 싸운다. 천년 묵은 용도 짐이다. 그리고는 용을 이기고 자유를 얻어낸다. 그래서 낙타는 사자가 된다.


    ② 2단계: 사자는 동물의 왕이기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하고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우선 모든 짐을 모두 벗어 버린다. 이제 사자에게는 더 이상 “너는 해야한다”가 원칙이나 모토가 아니다. 사자의 원칙은 “나는 원한다(Ich will)"이다. 낙타는 상급자가 있어 명령을 받으나 사자는 동물의 왕이기에 상급자가 없어 명령받지 않는다. 그래서 사자는 자기를 표현할 때 언제나 ”나”로 표현하고 명령을 한다. 바야흐로 사자는 모든 짐을 다 벗어던진다. 그래서 자유롭다. 자유가 “...로 부터의 자유( freedom from)”와 “...에로의 자유 (freedom to)”로 나눈다면 " ... 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하지만 사자의 이러한 자유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된다. 완전한 자유는 “...로 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에로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③ 3단계: 어린아이가 제일 잘하는 것은 노는 것이다. 놀기 위해서 논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논다. 노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따라서 이 단계는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단계로 “...에로의 진정한 자유”의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하게 바랄만한 상태이다.

    니체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마디는 “삶은 의지다.”(Leben=wille)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원한다.”(Ich will)가 되고, 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니체는 결국 삶을 “힘에로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책은 “짜라투스트라가 30세가 되었을 때 자기 고향과 호수를 떠나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10년간 고독 속에서 도를 닦았다. 하루는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을 향해 그 태양을 찬양하는 노래를 읊었다. 그리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할 말이 있기에, 즉 인간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다시 말해 10년 동안 터득한 것을 인간한테 가르쳐 주려고 산을 내려갔다.”라고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책의 구성은 1부:신의 죽음, 2부: 힘에로의 의지, 3부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시간문제), 4부 : 어린아이( 놀이문제)로 되어 있다.


    1부 - 초인과 신의 문제


    짜라투스트라는 하산하던 도중 숲속에서 어떤 늙은 은수자를 만났는데, 그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떠나 사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에게는 말을 걸지 않고 찬양과 기도 등으로 신에게만 말을 건넨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를 지나치면서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 늙은 성자가 아직도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니 . . . 이상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작품 속에서 니체는 신이 왜 죽었는지 아무런 논증을 하지 않고, 신이 죽었다는 것이 자명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인간한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은수자처럼 더 이상 산에 머물지 않고 하산하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작품 『즐거운 학문』(No. 125)에서 도움을 청하자.


    『 너희는 저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느냐? 그가 대낮에 등불을 밝혀들고 시장 바닥을 헤매며 “나는 신을 찾는다”고 외쳤다는 저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너희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그가 그렇게 외치고 다니자 시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한다. “신을 찾는다니? 신이 미아가 되었단 말인가? 여행을 떠났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서워 어디 숨었다는 말인가?" 하며 비웃는다. 


    그러자 그 미친 사람이 화가 나,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가 가르쳐 주겠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던 가장 강력한 그것이 죽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내가, 인간이 했다. 그 엄청난 일을 말이다! 이제 오른쪽과 왼쪽, 앞과 뒤, 위와 아래가 따로 있느냐? 지금까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었기에 오른쪽, 왼쪽, 앞뒤가 있었지만 이것이 무너졌는데 아직도 앞과 뒤가 있느냐?” 점점 더 밤이 다가오고 있다. 어둠이 그 입김을 불어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곤두박질치고 있지 않는가? 소문에 의하면 그 날 그 미친 사람은 사방에 돌아다니며 교회마다 들어가서 장송곡을 불렀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말리면 신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 . .그렇다면 교회란 신의 무덤 외엔 무엇이 다르냐? 그러니 장송곡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또 다른 단장에서 니체는 “가장 엄청난 그리고 새로운 사건, 신이 죽었다는 사건이 온 유럽에 그 첫 그림자를 던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의 죽음, 그 이유는 우리가 죽였다는 것이다. 하여튼 인류가 소유하고 있던 가장 신성하고 가장 강력한 존재가 쓰러졌다. 신의 죽음 이후 “피안”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제 피안에서 가치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차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 가치를 가르치는 사람이 초인( Ubermensch)이다. 초인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뿐이다. “제발 피안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대지를 무시하고 저 피안에만 눈을 돌려 왔기에 이제는 차안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피안으로 뛰어넘어 가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제 2부 힘에로의 의지


    신의 죽음 이후 저 세상은 사라지고 없다. 피안 또는 초월의 세계는 사라져 버리고 이 세상(삶)만 남는다. 그런데 삶은 의지이다. 삶은 힘에로의 의지이다. 이 의지 앞에 신도 견뎌나지 못하고 죽는다. 그는 자기가 커지려는 것만 안다. 따라서 삶에게 있어 힘에로의 의지가 커지는 것 그것이 선이고, 줄어드는 것 그것이 악이다. 또한 힘에로의 의지가 커지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이고, 줄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불행이다. 따라서 삶에 있어 일체의 것은 힘에로의 의지이다. 니체는 이 같은 의지가 다음과 같은 데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① 개념 : 인간의 삶은 수시로 커지고 있고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을 개념화시킨다. 이런 개념화된 것은 참된 의미의 삶이 아니고 바래진 삶이다. 개념화속에는 삶을 움켜쥐려는 경향이 숨어 있다. 사상가들은 종종 삶을 개념화시켜서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② 가치 : 도덕가들은 삶에 있어 이것은 가치가 있다. 또는 저것은 가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보다 더 가치 있다. 또는 덜 가치 있다 고 판단한다. 즉 도덕가는 이것은 선이다. 또는 악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것은 결국 자기의지의 발동이다. 삶을 두고 자기의지로 이것이 가치가 있다. 또는 저것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더 가치 있다 또는 덜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③ 봉사 :봉사 속에도 힘에로의 의지가 들어가 있다. 봉사하는 사람도 봉사하면서 그 사람을 휘어잡으려는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봉사처럼 보여도 자기의지의 발동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면서 그 사람을 휘어잡으려는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


    결국 사상가, 도덕군자, 종교가등 모두에게 의지가 깔려있다. 이렇게 삶은 그 자체가 의지이다. 이 의지는 한없이 커지기를 바란다. 의지가 커지는 것이 선이고 줄어드는 것이 악이다. 커지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이고 줄어드는 것을 보는 것이 불행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커지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모두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짜라투스트라가 하산하여 사람들에게 신은 죽었다. 


    삶은 의지이다. 의지가 커지는 것이 모두이다 라고 설교하고 다니던 중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시간의 문제이다. 삶은 의지라고 했으나 시간 앞에서 의지는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결국 죽고 마 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의기소침해져서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왜냐하면 시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계속 설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부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힘에로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린 것이 시간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설교하다 말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는 모든 이론이 서지 않기에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시간 앞에서 의지, 삶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짜라투스트라가 호숫가에 나와 물결치는 것을 보았다. 전체는 변하지 않고 때가 되면 올라오고 때가 되면 내려가는데서 이 문제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다. 또한 서양에서는 어떤 동네에 들어가기 전에 문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이 문이 보였다. 


    여기서 짜라투스트라는 힌트를 얻어 이 문을 “순간”이라 하고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앞쪽으로도 뒤쪽으로도 길게 이어져 있는 길을 시간이라고 본다. 이 길은 지나간 무한한 시간(과거)과 닥쳐올 무한한 시간(미래)을 뜻한다. 지나간 무한한 시간이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일어나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닥쳐올 무한한 시간이란 일어날 것은 이제 앞으로 비로소 생겨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아직 벌어지지 않고 앞으로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앞으로 일어날 것은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 즉 동일한 것이 영원히 돌고 도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간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일어날 것이 일어난 것이 되고 이것은 또 일어날 것이 되기에 그러하다. 결국 시간은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이 작업으로 시간 앞에서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데서는 건져진다. 그러나 ‘커진다’는 것은 포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것이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기에 더 커질 것도, 더 작아질 것도 없겠기 때문이다.



    제 4부 어린아이


    짜라투스트라는 이제 머리가 희어졌고 산으로 세상 사람들을 초청한다. 동굴 앞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내가 지금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기보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아야지”하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사는 것을 지겹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한없이 반복된다는 것은 참으로 지겨운 노릇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해결책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놀기 위해 논다. 짜라투스트라는 “너희가 잘못 된 것은 놀 줄 모르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래서 동굴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는 “노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놀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든지 놀아라”고 한다. “삶이 고통일지라도 얼마든지 다시 오라. 나는 구애받지 않고 그저 놀겠다”라고 한다.



    2. 형이상학 넘어서기


    니체는 이 후 지금까지 서양이 쌓아놓은 일체의 것을 부수어 버리겠다고 한다. 먼저 니체는 형이상학을 부수기 시작했다. 형이상학의 시작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플라톤과 대결한다. 플라톤의 사상에 의하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얻어 만나는 것들은 “아니 있는 것”(μη ον)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니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 역시 아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의 삶에 매달리지 말고 저기 있는 참된 삶(Idea의 세계)에 매달려야 한다. 이에 대해 니체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삶의 배반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따라서 니체와 본격적으로 반대되는 이는 플라톤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은 그 뿌리에 있어서 니힐리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체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삶은 의지이다. 그것도 힘에로의 의지이다. 자기가 커지는 것 그것이 선이고 행복이다. 그런데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나서서 선한 것, 옳은 것이 있다. 그것을 추구해야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가르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것 때문에 내 삶을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한 것 앞에서 내 의지를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가르친 윤리는 “노예의 윤리”이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 이후로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노예처럼 자기를 굽혀 삶을 망가뜨려 놓았다. 


    그 반면 니체가 가르친 윤리는 “주인의 윤리(Herrenmoral)이다. 이 때 주인이란 말 속에는 “왕”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노예의 윤리는 노예근성의 윤리로서 속물들이 위대하고 강력한 자들을 얽어 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즉 속물들이 자기의 무능력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수작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결국 니체에게 윤리란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것이다. 이제 윤리는 주인의 윤리로 바뀌어야 한다. “내가 원한다(Ich will)”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윤리학도 부숴버려야 한다.


    종교비판은 윤리비판의 연장이다. 종교는 사랑을 가르친다.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종교 역시 노예근성의 윤리를 받아들여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란 대중화된 플라토니즘”이다.“종교란 단순히 플라톤의 철학을 가져와 일반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애매하게 옮겨 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란 엄격한 의미의 플라톤 철학도 아니며 대중화된 플라토니즘에 불과한 것이다. 단적으로 플라톤이 말한 노예근성의 윤리를 받아 그것을 보호해주면서 지켜나가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교는 윤리학과 플라톤의 형이상학의 합성일 뿐이다. 


    즉 대중화된 윤리체계이고, 대중화된 형이상학일 뿐이다.” 이러한 니체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은 플라토니즘과 윤리비판 대한 연장일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도 부숴야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서양이 2500여 년간 만들어 놓은 모든 사상이 니체 앞에서 부서지고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니체는 이제까지의 서양을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다. 


    1) 니체에 의하면 삶은 의지이다. 이것은 대단한 착안점이다. 철학은 의지의 발로이다. 흐르고 있는 삶을 개념으로 잡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의지의 발로라든가, 봉사 속에도 지배하려는 의지가 숨어있다고 하는 것은 사상적으로 독특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을 배격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독일관념론의 대표인 헤겔을 배격하고 있다. 관념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죄는 여기서 생긴다. 내가 모두라고 하는 데서 생긴다. 


    2) 시간은 일체의 것을 삼켜버린다. 시간 앞에서 있는 것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일체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시간을 좀 더 추상적으로 얘기하면 역사이다.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사라질 존재이다. 시간은 결국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을 짊어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결국 시간과 해결을 봐야 한다. 그의 해결책은 불교의 시간관이다. 바로 회귀이다. 불교의 시간관은 시간은 돈다고 본다.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막까지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3)니체에 의하면, 신이 죽었기에 인간에게는 삶만 남았다. 삶은 의지이다. 그러니 인간은 무엇이든지 다 해도 된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서는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삶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니체에게는 처음부터 삶은 의지이다. 그 의지 앞에서 신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죽어야 한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 사람이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신을 찾는다고 외친다. 따라서 니체는 마음 속 깊이 사람들이 떠드는 신이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의 신을 찾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미친 사람을 시켜 신을 찾는다고 외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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