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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존철학-훗설의 현상학
    인문학과 철학 2014. 9. 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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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Ⅳ. 훗설의 현상학



    현상학(Phanomenologie)이란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현상학적 철학 (Phanomenologische Philosophie)” 에 있어서 조차 그 내용과 방향이 서로 같이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즉 이러한 현상학적 철학이 비록 그 발전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할지라도 그 출발점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동일한 출발점이란 독일 철학자 에드문드 훗설(1859-1938)이다. 철학적 현상학의 창시자인 훗설은 원래 수학을 전공했었다. 젊은 수학자였던 훗설은 프란쯔 브렌타노(Franz Brintano, 1838-1917)의 철학 강의를 듣고 난후 철학을 그 생애의 소명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하나의 철학체계가 아니라 철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당시의 학문은, 한편으로 그 실증주의적 기본태도 때문에 눈앞에 놓여 있는 경험적 사실인 “실증적 사실 (Positives Faktun)” 만을 문제 삼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다른 한편 당시 새로이 등장한 “비판적 경험주의“ (Empiriokritizismus)는 학문을 “감각 (Empfindungen)” 에로 환원시켜 버렸다.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와 리캬르드 아베나리우스(Richard Avenarius, 1843- 1896)가 주도하고 있던 이 비판적 경험주의는, 결국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다만 감각뿐이라 했다. 


    따라서 물리학과 심리학 그리고 심지어 논리학과 수학까지도 오직 감각을 다루고 있을 뿐이라 했다. 이러한 학설이 만일 정당하다면, 모든 학문은 근본적으로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시 말해서 모든 학문은 결국 그 토대를 심리적인 것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학문의 위기 상황 속에서 훗설은 여러 해에 걸쳐서 학문의 토대를 주관적인 심리주의(Psychologismus)가 아닌 하나의 엄밀한 객관성위에 세워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1900년과 1901년에 두 권으로 출판된 “ 논리연구 ” 이다. 이 저서와 더불어 다름 아닌 바로 “ 현상학적 철학 (Phanomenologische Philosophie)” 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훗설의 이 “ 논리연구 ” 는 그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현대사상을 위한 하나의 돌파구가 되었다. 어떻든 훗설은 이 논리연구를 “ 하나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 ” 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그 후 쉴 줄 모르고 계속되었고 1913년 이래 세권으로 된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에 대한 이념” 을 완성하였다. 훗설의 현상학적 철학은 이 저서에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1)지향성


    훗설은 무엇보다 먼저 학문이 바로 학문이 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객관적 관련성(Objektiver Zusammenhang)”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고 있다. 훗설의 이 말은 우리에게 평범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훗설에 있어서 이 말은 결정적인 말이다. 


    인식행위(Erkenntnisakt)를 수행할 때, 우리는 “대상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Mit dem Gegenstandlichen benchaftigt)”. 우리는 인식행위속에서 인식 행위를 가지고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식행위가 인식하고 있는 내용인 대상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 이때 인식행위는 “자기를 넘어서서(Uber-sich-hinaus)”, 그 무엇에로“향해있으며 (Gerichtet-sein)”, 그리하여 “그 무엇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Beschaftigt-sein mit Etwas)”. 이와 같이 모든 인식행위가 자기를 넘어서서 그 무엇에로 향해 있다는 사실이 인식행위의 “지향성(Intentionalitat)”이다. 따라서 모든 사고행위나 인식행위는 반드시 자기행위를 넘어서서 그 무엇에로 향해 있기 때문에, “志向的 行爲(Intentionale Akt)”이다. 


    그리고 이때 이 “지향적 행위”에는 “대상이 원래대로 주어져 있다(Das Gegenstandlicheist originar gegeben). 예컨대 인식행위 자체에 그 인식내용 즉 대상적인 것이 주어져 있다. “대상”그것은 인식행위 자체에 이미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인식행위가 그 대상을 비로소 구성해 내거나 자기 밖으로 투사해내는 것이 아니다. 이 “주어져 있는 것(Das Gegebene)”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 자기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Das Von-sich-her-sich-Zeigende)이다. 이것이, 훗설이 말하고 있는 “현상”이며 “事象(sache)”이다. 


    이와 같이 인식행위에는


    첫째, “그 무엇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는 사실과 

    둘째, “그 무엇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은 훗설에 의하면 인식행위에 있어서 “志向性(Intentionalitat)”이 갖는 두 측면이다. 훗설은 인식행위가 갖는 이와 같은 “志向性”을 분석해 냄으로써 당시의 인식론에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훗설의 지향성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전 현상학적 철학에 토대가 되었다.



    2) 현상학적 환원


    훗설은 이제 지향성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현상학적 환원(Phanomenologische Reduktion)”을 통해서 좀 더 깊이 파고들고 있다. “현상학적 환원”이란 일반적으로, “체험”이라는 개념을 순수하게 현상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며, 따라서 단순한 경험사실에 관련되는 모든 것을 배제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단순한 경험사실(Empirisch reales Dasein)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배제해 버리겠다는 훗설의 의도는, 우선 “方法論的인 것”이다. 이러한 엄격한 방법론을 통해서만이 주어져 있는 현상이, 주어져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인 현상이 자기를 순수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환원이란 무엇보다 먼저 사고하는 주체가 “하나의 태도변경 (Eine Umkehr der Einstellung)” 을 하는 것을 말한다.


    훗설에 의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하나의 “자연적 태도 (Naturliche Einstellung)” 를 갖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듣고 또한 접촉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우리 자신이 보고 듣고 접촉하는 대로 “ 그러하다 ” 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이러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태도를 훗설은 “ 자연적 태도 ” 라 칭한다. 그런데 훗설에 의하면 모든 “실증적 학문(Positive Wissenschafels-Versuch)”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자연적 태도로 세계를 본다고 한다. 그런데 훗설에 의하면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의심하는 그러한 시도(Allgemeiner Zweifels-Versuch)를 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물, 벌어지는 事件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듣고 접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전적으로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훗설의 이러한 작업은 데까르뜨가 그의 주저 “笰一哲學에 대한 성찰”에서 하고 있는 작업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훗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데까르뜨와는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훗설은 여기서 한편으로 “ 세계는 단순히 하나의 환상이다” 라고 하는 일반명제의 딜레마를 “하나의 태도변경(Eine Umkehr der Einstellung)”을 통해서 풀고 있다. 훗설이 말하는 이 태도변경이란 일반 명제들 중 어느 것도 주장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그들을 모두 괄호 속에 묶어 버리는 그러한 태도(Eindlammerung)이다. 대상과 관련을 가진 일체의 “學問的 세계”(實證學問이 대하는 세계)가 괄호 속에 묶여 버린다. 


    즉 보류 되고 만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괄호 속에 묶어 버린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일체의 것을 괄호 속에 묶어 버리고 보류해 버리는 태도를 훗설은 “ 현상학적 판단중지 (Phanomenologische εποχη)” 라 칭한다. 또는 “ 현상학적 환원 (Phanomenologische Reduktion)” 이라한다. 


    현상학적 판단중지 또는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은 “절대적 영역”, “절대적 존재영역(Die absolute sein-sphare)”이다. 그리고 이 영역은 모든 학문과 철학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절대적 존재영역”을 훗설은 “현상학적 잔여(Das Phanomenogische Residuum)”라 칭한다. 


    이러한 현상학적 잔여란, “세계는 실제로 있다” 또는 “세계는 실제로 없다”라고 하는 모든 일반명제들이 괄호 속에 묶여버린 후에 “남는 것”이며, 훗설은 이것이 절대적 學問의 토대가 된다 했다.


    모든 일반명제들이 괄호 속에 묶여버리고 나면, 이 때 어떻든 괄호 밖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이것이 실제로 있는가 또는 단순히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자기를 드러냄(Sich-zeigen)”은 남는다. 이러한 순수한 “자기를 드러냄” 또는 “드러남“ (Erscheinen)”을 서술하고 분석하는 것, 그것이 훗설에 의하면 새로운 절대적 학문의 토대이다. 훗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결국 이 토대를 얻어 내려 하는데 있다. 


    이와 같이 훗설의 현상학적 판단중지 또는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 “현상성 (Phanomenalitat)” 이라고 하는 일반적 토대가 주어졌을 뿐 아니라, 모든 가능한 학문의 토대가 주어지게 되었다. 훗설의 이러한 작업은 하나의 놀랄만한 작업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그의 이러한 작업은 엄청난 해방의 구실을 했다.


    근대철학이후 사람들은 외계인 실존성 그리고 감각소여의 유효성에 대해서 끝없는 논쟁을 벌여 왔다. 이 모든 논쟁은 훗설의 작업을 통해서 괄호 속에 묶이고 만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이론들은 무엇이나 괄호 속에 묶이고 보류되고 만다. 


    그리하여 어떠한 장애나 방해도 없이 “주어져 있는 것”,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나의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진다. 만일 사태가 이러하다면 어떠한 주제를 다룬다 할지라도 이제는 처음부터 그것이 금지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그것을 서술하고 분석해야 한다.훗설의 이러한 현상학적 철학은 그 후 철학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3) 현상학적 방법론


    방법론에 대한 현재의 논의들 가운데 우리들의 사고를 엄밀하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 대표적인 것은 우선 현상적인 방법론이다. 이것은 특히 정신과학 분야에 있어서 그 고유한 문제에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고 또한 그러한 문제를 해명해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방법론은 오늘날 중요한 방법론 중에 하나로 되어 있다. 현상학적 방법론은 현상학을 그 토대로 하여 성립된 방법론이다. 


    객관적으로 스스로 “주어져 있는 것(das Gegebene)”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그 자체로 관찰하는 것이 현상학의 본질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방법이란 독특한 인식방법으로서 “주어져 있는 것”을 정신적으로 직관하는 방법이다. 


    현상학적 방법은 첫째로 주어져 있는 “사실 그 자체”를 직관하기 위해서 모든 “주관적인 것을 전적으로 배제해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객관적인 태도로 임해야 한다. 


    둘째로 “ 사실 그 자체” 만을 직관하기 위해서 모든 주관적인 태도를 제거해버려야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찰의 대상 속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는 모든 객관적인 것 역시 배제해버려야 한다”.직접 주어져 있는 것 즉“현상” 만을 보아야 하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현상학적 방법은 이와 같이 모든 간접적인 장애물을 제거하고 난 이후 거기 “남아 있는 것” 즉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기술해야 한다. 이“남아 있는 것”즉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훗설은 “본질직관”이라 한다. 따라서 현상적 방법론은 한마디로 본질 직관적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은 다양한 인문학에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들의 일상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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