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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표현
Ⅰ. ‘생각하기’
1. ‘본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본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본다는 것’, 그것은 우선 두 가지 ‘기본 특성’을 가진다. 우선‘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또는 세상 사람들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자기 자신이’스스로 그리고 직접 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보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존한다거나, 내가 직접 보지 않고 다만 세상 사람들의 말에 매달리기만 하는 것은 참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과 권위 때문에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독자성과 자립성을 가지고 내가 보는 것이다. 이것이‘본다는 것’이 갖는 첫째 기본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본다는 것’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주어져 있는 것’(das gegebene)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 앞에‘주어져 있는 것’, 그것을 문제 삼아야 하고, 그것만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것이‘본다는 것’이 갖는 둘째 기본 특성이다. ‘주어져 있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흔히 우리는‘주어져 있는 것’을 문제 삼는다고 하면서도,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 생각이나 우리 느낌을 문제 삼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주어져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느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참된 의미에 있어서‘본다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본다는 것’ 은,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주어져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자유롭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주어져 있는 사물이다 사실에 매여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본다는 것’에 있어서 따로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다음으로 ‘본다는 것’은 그 ‘기본 조건’을 가진다. 그렇다면 그것의 ‘기본 조건’이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첫째로 ‘여기서’ 또는 ‘ 저기서’ 보게 마련이다. 어떤 사물이다 사실을 볼 때, 보는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여기’라는 자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보는 사람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저기’라는 자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 또는 ‘저기서’라고 하는 자리 내지 장소는, ‘본다는 것’에 있어서 그 첫째 ‘기본 조건’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주어져 있는 사물이나 사실을 볼 때, ‘여기서’와 ‘저기서’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엄청나게 달라진다. 우리가 어떤 사물, 예컨대 책상을‘여기서’ 볼 때, 저쪽보다 ‘이쪽’이 단연코 크게 보인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저쪽’은 분명히 작게 보인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일정한 사실을‘여기서’ 볼 때, ‘이 사실’은 저기 ‘저 사실’보다 더 크게 보일뿐더러 훨씬 더 잘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 ‘이 사실’을 저기 ‘저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저기 ‘저 사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치부해 버리게 된다. 그자체로 보아서 결코 탓할 수 없는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여기서’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한 사실을 우리가‘여기서’보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른 한편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물이다 사실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물이다 사실을‘여기서’가 아니라‘저기서’보고 있다.
‘본다는 것’은, 둘째로 ‘이전에’ 또는 ‘이후에’라는 것을 갖게 마련이다. 어떤 사물이다 사실을 볼 때, 보는 사람은 다른 시간이 아닌 바로 이 시간, 즉 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이 때라고 하는 그러한 때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전에’ 또는 ‘이후에’라고 하는 시간 내지 때는, ‘본다는 것’에 있어서 그 둘째 ‘기본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주어져 있는 사물이다 사실을 볼 때, ‘이전’과 ‘이후’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엄청나게 달라진다. ‘이전에’ 우리가 아직도 어렸을 때, 고향집 마당은 그렇게도 크고 넓게 보였다. 그런데 ‘이후에’ 우리가 어른이 되어 고향집을 다시 찾았을 때, 그 마당은 아주 좁고 옹색하게 보인다. 또한 ‘이전에’우리가 어려서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을 때에는 그 고향은 단순히 하나의 평범한 삶의 공간에 지나기 않았다. 그런데‘ 이후에’우리가 오랜 세월을 고향을 떠나 살아가고 있을 때, 그 고향은 잊을 수 없는 정겨운 고장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는‘이전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하나의 평범한 사실로 보였을 뿐이다. 여러 사실 중에 하나의 사실로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후에’ 우리가 나이를 먹고서는,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이 다른 사실들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실이라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이전에’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는 동일한 것을 ‘이후에’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다는 것’은, 셋째로 하나의 ‘시야’를 가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 자체가 하나의 ‘시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시야’ 속에 있는 것만을 볼 수 있다. 우리 ‘시야’를 벗어나 그 밖에 있는 것을 우리는 전혀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것은 우리의 ‘시야’ 속에서는 자기를 들어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추어져있기 때문이다. ‘눈의 시야’, 그것은 ‘본다는 것’에 있어서 셋째 ‘기본 조건’이다. 그리고 우리 ‘시야’를 벗어나 그 밖에 주어져 있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다른 사람이 자기‘시야’에 주어져 있는 것을 그가 스스로 보고 난 후에, 우리에게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만일 다른 사람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시야’를 벗어나 그 밖에 있는 사물이나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여기서 전적으로 무력할 뿐이다. 그리하여‘본다는 것’,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듣는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주어져 있는 것’ 그 자체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제한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기 - 여기서 또는 저기서, 이전에 또는 이후에 그리고 시야-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대화’라고 한다. 듣는 것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면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러나 세상에 타인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나는 모두가 아니고 부분이다. 다른 것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듣는 것을 배재한 사람, ‘내가 보는 것만이 모두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대화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한정되어있다. 그런데 자신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마다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듣는데서 온다(Fides ex auditu)라고 하였다. 시야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듣고서 알 수밖에 없기에 계시가 필요한 것이다.
2. ‘거리취하기’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본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거리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대상화하여 거리감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눈을 가져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판적으로 생각하기이다. 이러한 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금욕적인 존재’ 혹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부른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자기 환경에 맞는 전문적인 육체의 기관기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동물에 비해서 생물학적으로 결핍존재이지만 다른 것을 대상화하여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 뿐 만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조차도 대상화하여 거리감을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초월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바로 그것은 인간이기를 그만 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것에 습관들여져 있다. 왜냐하면 생각하고 살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정신병원에 보낼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피를 흘리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생각해 볼만한 것’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대상화하여 바라본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주어져 있는 것’ 그 자체이다. 또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제한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하기란 ‘더불어 생각하기’이다.
우리는 ‘생각한다는 것’ 속에서 두 가지 계기를 얻어 만난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어지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도대체 생각해 볼만한 문제란 어떤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내가 ‘스스로 주어져 있는 것’을 ‘바라다보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생각해 볼만한 것’이란 무엇인가?
1) 무엇보다도 ‘내가 여기 있다(Ich bin da)’는 사실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이 현존재(Dasein)는 데카르트에서처럼 논리적으로 물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묻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에게 문제이다. 이것은 생각해 볼만한 첫 번째 대상이다. 2) 두 번째로 주어져 있는 것은 나 자신 외에 ‘다른 것’이다. ‘내’가 주어져 있다면 나이외의 ‘다른 것’ 역시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이 ‘다른 것’은 사유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요청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해 볼만한 두 번째 대상이다. 3) 세 번째로 ‘나’와 ‘나 자신이외의 다른 것’이 주어져 있는 것이라면 이런 것들의 원리와 근원이 문제시 된다. ‘나’와 ‘나 자신이외의 다른 것’ 즉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어떤 ‘절대적인 것’이 요청으로서 주어져 있다. 이것은 생각해 볼만 한 세 번째 대상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문제는 위의 세 가지 대상 즉 ‘인간’, ‘세계’,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비판적인 의식을 가져가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존재론적인 접근(Sein)과 당위적인 접근(Sollen)이 가능하다. 전자는 전통적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본질을 문제 삼는 것이고, ‘사는 것’의 문제는 바로 행위의 문제이다. 따라서 인간, 세계, 신등의 본질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이고,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다루는 것은 ‘윤리학’이다. 어쩌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일상이고 삶의 커다란 두 가지 토대이다.
Ⅱ. ‘글쓰기’
글쓰기란 우선 주어져 있는 것을 관찰하거나, 문자화된 남의 생각(독서)과 경험을 통해서 자식을 얻은 후, 이를 되새김하여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 즉 현실을 비춰보는 발판을 마련하여, 수사학적 상황이 주어졌을 때 현실에서 자신의 뜻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거나 주제에 따라 현실을 재단해내는 과정이다. 달리 말하면 “글쓰기란 인간관계에서 얻은 직간접 경험과 글로 된 다양한 텍스트들을 독해, 분석, 평가한 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텍스트를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1. 왜 글쓰기가 중요한가?
글쓰기는 우리의 사유를 창의적이고 비판적이며 논리적으로 만들어 준다. 특별히 글쓰기는 주제를 설정하고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준다거나, 논쟁을 할 때 우위를 선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논리와 반론을 논리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도록 도와준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다. 글을 쓰면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좀 더 명확히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이 중요하며, 또 어떤 부분에 대해 질문하고 좀 더 연구를 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끔 해준다. 따라서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통하여 자신의 사고영역과 지식을 확장하게 해준다. 자신의 생각과 남의 생각이 맞닿은 접경에서 유사점과 상이점도 발견하게 해주며, 또한 자신의 위치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또한 논쟁의 상황에서는 논리적인 생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인생관, 세계관 등을 보다 명확하게 하여 현실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글쓰기는 의사소통의 필수 수단이다. 현대의 창의력은 어느 한 개인의 능력보다는 집단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소통의 능력은 서로가 협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학문의 세계나 전문적 집단속에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면 어떤 것을 개발하고 창조하는데 참여할 수 없다. 이 의사소통은 주로 문자로 이루어진다. 그 그룹 내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이 발표한 것을 이해하고 또 나의 연구를 글로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자로 지식을 창출해 내지 못하면 아무리 귀중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남에게 알릴 수 없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의사소통을 통하여 창의력과 지식창출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
1) 읽기
직접적인 경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아 이를 통하여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독서는 이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남이 표현해 놓은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보는 눈을 개발해야 한다.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한 주제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바라 본 다양한 사람들의 글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또한 깊이 있게 읽어야 한다. 저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글을 잘 쓸 기회가 많다. 저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서론이나 결론부분에서 표현해 내는지, 이 글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읽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류든 비소설류든, 그들이 쓰는 단어뿐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지,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지에 관해서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책, 뉴스, 잡지 기사도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있는 글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글 하나하나가 얼마나 힘들게 쓴 작품인지를 생각하면서 좀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글을 많이 쓰면,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이다. 많이 쓴다고 해서 잘 쓰는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 생각하며 쓸 수 있냐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읽기를 잘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읽기자료를 논리적으로 연결하여 글을 쓰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읽기와 글쓰기에 들어가는 시간은 거의 같아야한다. 쓰기 못지않게 배경지식을 담은 읽기자료를 충분히 읽고 자신의 관점을 세워야 한다. 곧, 다양한 읽기자료를 참고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재정리하여 글을 써야한다. 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글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를 찾고 그 다음에 글을 써야한다.
다른 한편 능동적인 읽기는 바로 요약하기를 의미한다. 요약은 주어진 텍스트의 내용을 간략히 하는 과정이다. 텍스트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한 다음,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작업이다. 요약은 결국 텍스트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작업이다. 논평은 요약을 대상으로 그 안에서 문제가 있을 경우 비판적 내용을 제시하는 형태이다.
2) 비판적 사고
비판적 사고란 “사고에 대한 사고” 즉 반성적 사고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 사고에 대한 사고”란 타인의 생각이나 자신이 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모두 비판적 사고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적 사고란 분석하고 평가하는 사고이다. 사고의 근거를 성찰하고,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철저하게 평가하는 사고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근거나 원천, 그리고 그 생각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서 개선적인 방향에서 사고를 평가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판적 사고란 주어진 글들의 사고과정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석이란 글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 과정의 중요한 요소들을 추려내는 것을 의미하고, 평가란 그 추려낸 요소들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따져보는 것을 의미한다. 분석 작업은 글에 포함되어 있는 결론적인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제적 이유가 무엇이고, 어떠한 논리적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 작업의 최종 결과는 글로부터 추려낸 결론적 주장, 전제적 이유, 드러나 있지 않은 가정 등에 기초한 논변이다. 다음으로 평가 작업은 분석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논변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물음을 던져보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평가를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들은 “전제적 이유들은 받아들일 만한 것인가?”, “전제적 이유들은 결론적 주장을 함축하는가?”, “전제적 이유들은 결론적 주장을 강하게 지지하는가?”, “논변에서 논리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등이다.
비판적 사고는 주어진 글에서 다루는 현실이나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 글에서 무엇을 다루었고 또 무엇을 누락시켰는지를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사고이다. 비판적 사고 능력은 타인의 글을 읽을 때 그 글의 의미와 글 뒤에 숨어있는 다른 현실을 찾아내거나 논리적 오류를 발견해내게 해주며, 타인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 대조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고 정확하게 접근하여, 이에 대해 보다 나은 생각과 글을 생산해 내는 능력이다.
3) 쓰기
글쓰기는 단계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방식에 따르면 글에는 고급과 저급이 있어 저급(쓰기 쉬운 글)의 글을 쓸 줄 모르면 고급의 글은 쓰기가 힘들다고 여긴다. 다시 말하면 단계별로 서술, 묘사, 정의, 설명 등을 구사할 줄 모르면 그 상위의 글들인 논술, 논쟁, 연구 등의 글들을 쓰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낮은 단계로부터 단계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관점의 연습은 나의 생각 표현하기,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서술하기,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 논술하기, 그리고 논쟁하기, 우리나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논하기 순으로 연습을 해야 한다.
글쓰기 과정은 크게 나누어 집필 전 단계(pre-writing), 집필단계(writing), 그리고 집필 후 단계(rewriting)의 세 단계로 분류된다. 집필 전 단계에서는 고안을 위주로, brainstorming, mapping, listing, clustering, 주제 고르기, 개요 짜기 등의 사전작업으로 이루어져 있고, 집필단계는 실질적으로 글을 쓰는 단계이고, 집필 후 단계는 다시 고쳐 쓰기 작업(revising), 편집 작업(editing) 그리고 교정 작업(proof-reading)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단계는 글 쓰는 이의 필요에 따라 골라 이용할 수 있다.
글쓰기의 전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상 마지막 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치밀한 계획 단계부터 주제를 골라 생각한 후 글을 재단하여 이에 알맞은 단어를 찾는 작업, 그리고 글을 완성한 후 더 나은 표현을 찾는 작업은 끝이 없이 펼쳐지므로 사실상 마지막 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Ⅲ. 글쓰기 과정
글쓰기의 과정은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다. 그러나 그 과정은 글감 기획과정, 자료수집과정, 글쓰기 과정, 글 고치기 과정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글감기획과정은 글감을 기획하고 주제를 정하는 단계이며 자료수집단계는 글감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검토하는 과정이다. 글쓰기 단계는 긍의 주제에 맞춰 내용을 문자로 표현하는 과정이며, 글 고치기 과정은 글의 잘못된 내용이나 표현을 수정하고 고치는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일반 글쓰기과정에 적용되지만 수사학적 글쓰기는 달리 적용될 수 있다.
수사학적 글쓰기는 수사학적 기술의 과정을 거친다.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수사학적 기술은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논거발견술은 설득에 필요한 논거의 수집에 관련된 기술이며, 논거 배열술은 논거들을 어떻게 배열하는지의 기술적인 부분을 의미한다. 표현술은 논거를 언어화하는 작업 또는 그 와 관련된 기술을 말한다. 여기에는 수사학적인 문체와 문채가 포함된다. 기억술은 논거의 표현된 내용을 기억하는 기법을 말하며 연기술은 실제적인 행동을 취하는 현장성과 관련이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단계가운데 글쓰기는 표현술에만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나, 글쓰기의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수사학적 기술의 전 과정과 연결된다. 글쓰기가 단순한 언어적인 기술만이 아니다. 글쓰기도 하나의 체계적인 과정을 겪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생산된 글이 완벽하고 설득력이 있는 글이 된다. 결국 수사학적인 기술의 과정을 통해서 수사학적인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1. 논거발견술 - 소재 발견술
논거발견술은 논거를 삼으려는 대상을 찾아내는 일이다. 글쓰기의 소재 발견술에 해당되는 것으로 글의 소재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은 수사학적 상황파악하기, 정보수집하기, 독자파악하고 정하기, 주제정하기, 관점정하기, 그리고 개요작성하기가 있다.
2. 논거배열술 - 글 구성술
논거배열술은 논거를 어떻게 배열하는 것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글쓰기의 주제가 있다면 그 주제에 맞게 소재를 어떤 식으로 구성하고 배치하느냐가 중요하다. 배치의 기술은 오랜 세월을 거쳐 발달했고, 후에 각기 다른 장르들로 존재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시대 연사들 이후 연사/작가들은 효과적인 논증을 위해 일정한 원칙을 적용했다. 우선 기본적으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나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원칙과 방법을 달리 적용하면서 여러 형태를 만들어 사용했다.
3. 표현술 - 표현술
표현술은 연사/작가가 단어, 표현, 그리고 문장 등을 사용하는 기술을 뜻한다. 수사학의 표현술에는 문체와 문채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글쓰기에는 문장의 표현과 단어의 사용이 해당된다. 글쓰기도 어떤 문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글의 문체가 달라지고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메시지의 전달이 달라진다.
4. 기억술 - 글수정술
논쟁의 네 번째 규범인 기억은 연설이 주를 이룬 사대의 산물이다. 연설을 하려면 해야 할 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 연단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설에 필요한 단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종이의 발견과 필기도구가 발달하면서 기억은 원고를 연설 전에 작성하고 이를 읽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글다듬기 또한 표현한 내용을 검정을 하는 기법에 속하게 되었다.
5. 연기술 - 글가공술
연기술은 몸동작이나 얼굴표정 등을 통한 직접적인 말하기 기술이다. 이는 청중을 위해 얼마나 설득력 있게 호소하느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연설이 논쟁의 글로 진행되는 시대에 들어서서 그 정의가 첨가 되었다. 그것은 문자로 독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글가공술로 행해 졌다. 문자화된 메시지를 독자들이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으로 독자들이 잘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을 빌린다거나, 그들의 지식과 언어 능력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내용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고를 완성한 후 자신에게 크게 읽어준다거나 원고를 더 좋게 다듬을 수 있도록 타인에게서 도움을 받는다거나 하는 방법들도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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