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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 이준영 전도사기독교 /설교 2015. 6. 20. 00:15반응형
본문 : 마 20:1-16
제목 :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4월 16일이 무슨 날인지 다들 아시나요? 저는 그날을 정말 잊지 못하는데요, 그 날은 작년 세월호 사고가 났었습니다. 저는 세월호 사고를 당하고 얼마 안되서 수요예배 때 하박국 강해설교를 하면서, 저에게 주신 개인적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제가 가진 관심은 바로 ‘정의’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때로는 분노에 싸이고, 때로는 좌절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제 자신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이 세상은 ‘정의’가 실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뭔가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좀 뭐하지만, 제가 예전에 교통사고가 났을 때 느낀 것이지만, 사고가 나서 보험에서 보상을 받을려고 보험료 책정을 할 때, 가장 먼저 계산되어 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그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 그 사람이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경제적 예상수입을 산정하여 그 산정기준에 따라 보험료가 책정되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번에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보험료가 책정될 때도, 다르게 책정됩니다. 결국 가난하거나, 경제적 가치가 적은 사람들은 그에 따른 보상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물론 자본주의 사회이니깐 그러한 결론이 나는 것에 대해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진 자의 생명가치와 못 가진 자의 생명가치는 차이가 있다는 단적인 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회가 ‘정의’롭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경제적 수입이 많은 분들은 ‘정의’롭다고 생각하시고, 공정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못가진 사람들은 ‘정의’롭고,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분명히 정의롭고 공정합니다.
이 사회에서 규정하는 ‘정의’는 무엇일까요?
과거 철학자들은 이렇게 규정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정의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본질은 평등,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하였으며, 고대 로마의 법학자인 울피아누스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리려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의 [正義] (Basic 고교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2006.10.30, (주)신원문화사)
얼마 전 제가 읽었던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마이클 센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많은 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독자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견해의 ‘정의’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수없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정의’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당연하겠지만, ‘정의’롭고, ‘공평’한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공평하신 하나님,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이며, 천국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방식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통치 방식,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처럼 우리 성도님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과연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천국은 ‘집 주인’과 같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집 주인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집 주인이 자신의 집에 있는 포도원에 일을 시키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품꾼들과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계약을 하고는 포도원에서 일을 시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새벽에 직업소개소 같은 곳을 나가면, 그곳에는 일감을 얻기 위한 일용직 사람들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과 일당과 오늘 할 일에 대해 소개를 하고는 구두로 계약을 하고는 차에 태워서 작업장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하루 일이 끝나고는 약속했던 일당을 주고 받고는 헤어지는 장면과 같습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 나온 집 주인은 그렇게 일을 계약하고는 품꾼들을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이 집 주인의 이상한 행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제 삼시에, 제 육시에, 제 구시에 그리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보는 모습입니다. 보통 일꾼들을 모집할 때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시점 한번으로 끝나야 하는데, 이 집 주인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보통 성경에 나타난 시간은 보통 6을 더하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이 되니깐, 아침 6시 정도에 처음 일꾼을 구하고는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까지 나가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9시, 12시,오후 3시에도 일꾼들을 모집해서 자신의 포도원에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마치게 될 오후 5시에도 나가서 일꾼들을 모집해서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결산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후 5시에 온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 오후 3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한 데나리온, 12시에 데리고 온 일꾼 들도 한 데나리온 그리고 9시 데리고 온 일꾼 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아니 새벽에 온 일꾼조차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되니, 오후 5시에 온 일꾼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시간만 일한 사람들과 수 많은 시간들을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나요? 아니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많이 일한 자에게는 더 많은 삯을 주는 것이 공정하고 공평한 것이지요. 이것 자체가 정의가 아닐까요?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일을 처리하는 집 주인이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동안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바로 저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이 저의 모습이니깐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 교회에서 어릴 때부터 열심히 일을 하고, 제 모든 인생을 주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목회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새벽부터 일을 하고 있는 일꾼의 모습이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는 그런 새벽부터 일을 하고 있는 저와 뒤늦게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어 천국에 온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구요?? 이건 말이 안됩니다. 억울하죠~! 저 역시 이들과 같은 불평을 하나님께 할 때가 있었습니다. 12절의 불평을 제가 한 불평으로 바꿔서 말을 해보겠습니다.
“주님!! 이건 불공평하잖아요.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늦게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온 저 몇몇 사람들과, 제 모든 인생의 대부분을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 온 저와 같은 취급을 하시겠다구요?? 말이 안됩니다. 주님은 공정하지 않아요. 주님은 정의롭지 않다구요. 저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땀도 안흘리고, 잠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왔지만, 저는 수많은 어려움과 수많은 고난과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받은 멸시와 천대를 다 참으며 이 자리까지 왔는데, 같은 취급을 하겠다구요??? 이건 말이 안됩니다”
어떠십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제가 말한 주장이 옳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하나님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성경에서 말을 하고 있는 품꾼의 이야기와 제 이야기가 오히려 맞는 논리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논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집 주인은 자주 나가서 일꾼들을 데리고 왔을까요? 오늘날 오너들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왜 취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 당시 배경을 좀 알아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돈은 그 당시 하루 일을 하고 받는 일당인 동시에, 가족들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최저 생계비 정도 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즉, 그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일을 구하지 못해 하루를 연명하는 것조차 힘이 드는 사회구조였던 것이지요. 오늘 집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을 가꾸고, 포도원을 수확하기 위한 일때문에 일꾼들을 모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6절과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집 주인이 나가보니깐 하루 일과가 마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일을 구하려고 서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주인이 그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있느냐’라고 책망합니다. 그랬더니 그 놀고 있는 일꾼들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그들은 일을 구하지 못해 혹시 지금이라도 일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배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집 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계약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품꾼들과는 동일한 계약을 하는 것이지요. 하루 일당, 하루 생활비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집 주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집 주인에게 있어서 일꾼을 더 쓰는 것은 자신의 포도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자체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하루를 살아 갈 수 있게 해 주고 싶은 그 마음!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것을 더 많이 불리고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를 편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일자리를 늘려주는 집 주인의 마음!! 바로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시키고자 하는 마음!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키고자 하는 그 마음!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이 있는, 한 사람 한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하나님의 마음!! 느껴지시나요??
이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리,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지고 평가받고 등급이 매겨지는 세상과는 다른, 오직 인격적으로 인간으로서, 한 영혼으로서 대우를 받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기에 존중받는 곳이기에 더 이상 차별도 없고, 더 이상 좌절도 없고, 더 이상 눈물과 고통이 없는 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너무 내 중심적인 곳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저, 내가 편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낙원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이 전적으로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지만,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을 그 자체로만 보고 평가하는 곳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닫고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천국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인간사회와는 다르다는 사실때문에 말이지요. 하나님은 영혼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으시기에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감사했습니다. 왜냐구요? 그 이유는 영혼 그 자체에만, 사람 그 자체에만 관심이 없으신 하나님이라면 저와 여기 앉아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구원을 받을 수 조차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출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이 그렇게 소중하고, 말할 수 없는 은혜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아까 서론에서 설교제목으로 말씀드린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직장생활, 가정생활, 사업, 교회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특히 여기 앉아 예배 드리는 교역자와 교사들에게 제가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 영혼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영혼이 아닌 다른 조건들을 보면서 그들을 양육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한국교회가 오늘날 수많은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돌을 맞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가치관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아직도 우리는 세상적 가치관과 세상 방식으로 여전히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세상을 쫓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이 땅에서 산다면, 저는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을 잘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축복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면 축복하신다는 말씀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소망합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땅에서도 살아서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메신저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향력을 미치며, 우리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그곳이 천국이 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주님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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