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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행진 - 이준영 전도사기독교 /설교 2015. 6. 25. 19:25반응형
본문 : 창 12:1-9
제목 : 예배의 행진
제 아들이 5살때 일입니다. 제 아들이 동물들을 좋아할 때라, 화창한 봄날에 서울대공원으로 갔습니다. 여기저기 동물들을 구경하는데, 한 장면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맹수관이었는데, 사자들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맹수관 우리 곳곳에는 '위험!!’ ‘추락주의’ 등등 경고 메세지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얼마전에 어린이 대공원에서 조련사가 사자에 물려 죽은 사건이 있었듯이, 사자를 비롯한 맹수들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사자들이 저와 제 아들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자들은 우리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맹수라도 우리안에 있으면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봐도,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은 변했습니다.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별명을 가진 종교가 되었고, 세상에서 목사는 먹사로 불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순간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기 계시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당당히 말하실 수 있는 분들이 계시나요? 아니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는 건 문제가 아닌데,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힘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신 분들이 계신가요?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세상에 물들어가고,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아닐까요?
원래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의 빛을 비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 가운데 선포하고, 그럼으로 인해 세상은 변하게 하는 폭탄을 던지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성경과 역사는 가르치는데, 왜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세상에 잠식되어 가는 사람들이 된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아까 제 아들과의 추억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맹수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 교회라는 우리 안에, 예배 라는 우리 안에 갇혀버려서 세상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오늘 이시간 드려지는 예배를 넘어서서 우리 삶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2절에 로마교회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 머물면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배 안에 머물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반으로, 삶의 터전으로 예배의 행진을 이어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믿음을 배워나가는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첫번째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친히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것,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성령님의 터치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람이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그가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가 있던 자리는 우상을 섬기던 자리였고,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었던 자리였으며, 아브람이 있었던 자리는 하나님이 없던 자리였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는 그 부르심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우상 대신 하나님을, 자기 자신이 주인행세를 하던 것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이 없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세로 바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나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옛 자아, 내 성품, 내 성격, 내 가치관, 내 삶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치신 그 방식으로 살아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이 되는가?
2-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아브람이 '복' 자체가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축복'이시기 때문입니다. 축복 자체이신 하나님이 아브람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아브람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은 무엇인가요?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 자신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은 아브람에게만 머물러 있는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을 받는다는 개념이 내 삶이 잘되는 것, 내가 무슨일을 하든지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은 아브람 자신만 누리는 축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내가 받는 축복, 내가 누리는 행복, 내가 누리는 영광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계획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는 축복과 아브람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 이유가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람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목표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립니다. 제일 먼저는 구원을 받아 천국을 보장받은 것이며, 천국의 소망을 가진 것이며, 천국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일 수도 있고, 권력의 축복일 수도 있고, 명예의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축복이든 땅의 축복이든, 그것이 우리에게만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받아 누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 땅의 모든 사람에게 흘러 넘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 이유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 평안이 나에게만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일까요?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 내어주시는 이타적인 사랑이었고, 그 이타적인 사랑에 빚을 졌는데, 우리는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누리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모습이니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큰 물줄기가 있습니다. 위쪽은 갈릴리 호수이고, 아래쪽은 사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 움직이는 천연의 창고라면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은 바다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생명체가 살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위쪽으로부터 물을 공급받아 아래쪽 사해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사해는 받은 물줄기를 자기가 받고서는 흘러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의 신령한 복이든, 땅의 기름진 복이든 우리가 받았다면, 우리에게서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 주변과 다른 이들에게 흘러넘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 그 사람들을 살리는 것, 모든 족속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소망하며 기도 제목이 생겼습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넘쳐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축복이 나에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흘러넘쳐 다른 이들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어느곳을 가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드디어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이었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습니다. 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러 무엇을 했나요?? 7절과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나요?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시드니 그레시다누스는 그의 책 '창세기 프리칭 예수'라는 책에서 이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 상수리나무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상수리 나무는 고대근동지역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입니다. 아브람이 상수리 나무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그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이제 이곳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물론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라는 의미를 그저 종교적인 제의적 단어로만 생각하면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예배라는 단어를 영어로 보면 Worship이란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의적 의미가 강합니다. Worship이란 단어와 함께 쓰이는 예배란 단어가 바로 Service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예배라는 의미가 Service라는 단어에 좀 더 가깝습니다. 출애굽기를 살펴보면 바로에게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5장 3절에서 모세는 바로에게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사라는 단어를 Worship으로 이해하면 바로가 모세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제사를 Service로 이해해야 바로의 반응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보내어 바로 당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바로가 모세의 제안을 거부하고 오히려 히브리 사람들을 압제했던 이유인 것이지요. 그들은 더이상 바로의 통치와 애굽을 섬기는 종이 아닌, 앞으로는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살아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에 만명이상 모이는 그레이스 처치를 담당하고 있는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책 '참된 무릎꿇음'이란 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 자신의 모든 삶을 예수 이름 앞에 무릎꿇는 것, 그리스도의 참된 종의 자세로 사는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 이름 앞에 무릎꿇지 않으면 우리는 예배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오직 주만 섬기는 것,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 이것이 예배자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신서인 야고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장 26절에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 가운데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인 것처럼 우리가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예배 안에서만 예배자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하나님만 섬기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2015년도 우리 일심교회 표어가 바로 '오직 주만 섬기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만 섬기는 예배자의 삶이 될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그 축복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어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 가운데 펼쳐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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