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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사는가? - 이준영 전도사
    기독교 /설교 2015. 6. 2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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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막 7:1-23

    제 목 :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사는가?




    우리 성도님들은 ‘전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통’은 한 민족이 오랜시간동안 살아오면서 축적된 지식, 삶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통’이란 것은 그 민족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상으로는 중국사람과 한국사람과 일본 사람이 별반 차이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시간을 조금만 같이 보내다보면 ‘전통’이란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전통’이란 것은 민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두 사람 이상이 모이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만이 가지는 ‘전통’이란 것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각 집안마다 그 집의 ‘전통’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들마다 ‘전통’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실 이 ‘전통’은 그 공동체 만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가정, 교회, 직장 등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는 오래되면 될 수록 그 공동체만의 독특한 ‘전통’이 생깁니다. 사실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익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적응하는 사람들이란 표현은 사실 이 공동체가 추구하는 ‘전통’이란 것에 반발하든지, 부정하든지,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전통’이란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인가? 입니다. 물론 ‘전통’의 시작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본질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모여서 생긴 것이 바로 ‘전통’이란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통’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오래된 공동체일수록 이 ‘전통’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아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진리라고 고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전통이 생긴 이유나 본질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그동안 고수해 온 ‘전통’이 올바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제가 계속해서 주장하고, 성경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통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이 ‘전통’을 선호하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의 개인적 신앙에서 ‘전통’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개인적인 신앙도 오래된 신앙일수록 ‘전통’이란 것이 생깁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도 ‘전통’이 없을까요? 아니요! 저희 교회도 오래된 교회이니, ‘전통’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 ‘전통’이란 것으로 내 행동의 원칙을 삼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1절~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사람이 예수님에게 왔었는데, 그 때 본 광경이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3절부터 4절을 보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정결예식을 따라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정결예식은 모세 시대부터 율법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율법으로 제정해서 지키라고 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결예식의 참된 뜻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러니깐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주장을 들은 예수님이 이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정죄하십니다. 그것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가지고 말입니다. 6-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에서 나오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는 구절이 우리가 유심히 봐야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이사야서의 사람의 계명을 사람의 전통으로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8절과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 중에 무엇을 중요시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바리새인에게 던집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 중에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여기 앉아계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답하실 겁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그 질문을 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여러분들과 같은 대답을 할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에 대해 지적합니다.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세의 율법, 특히 십계명 중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신 5:16)’ 입니다. 출애굽기 21:17과 레위기 20:9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고르반’이란 뜻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란 뜻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그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대표적 행동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며, 또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부모를 위해 사용하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사람은 욕심이 많으니, 그 욕심 가운데 자신의 재산이 부모를 위해 쓰는 것이 아까울 수 있으니깐요. 그러나 이들이 부모를 모시지 않고, 봉양하지 않는 것은 십계명 중 5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레위기 말씀처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으니깐요.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수는 없으니깐요. 부모를 봉양하고 싶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순 없는 이 딜레마 속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해 낸 지혜가 바로 ‘고르반’입니다. 자기 재산을 다 하나님께 바쳤으니, 자기는 부모를 공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만 들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말이 맞습니다. 이런 행동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누가 비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자기 재산을 다 바쳐서, 부모를 모실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더 그러하겠지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나님을 위해 전 재산을 다 바쳤는데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박수를 쳐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열심이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전통’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과 믿음을 인정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신 것이 문제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런 외식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13절의 말씀을 보면 이들은 이런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라 정작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져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하나님의 계명을 져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숨겨진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속에 있는 욕심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선언하십니다. 15절~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음식이 자신들을 더럽힌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외부로부터 더러운 것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으로부터 더러운 것이 나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여지는 종교적 행위와 열심으로 정결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1절~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 즉 악한 생각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봐야 할 것이 바로 우리 마음안에 감춰진 ‘악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려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우리의 종교적 행위와 헌신과 믿음의 행동 안에 감춰진 우리의 악한 마음과 인간적인 욕심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난 이후, 그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 있습니다. 


    “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6-10)”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종교적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을 하나님 뜻 앞에 굴복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로마서 12장 1절~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할까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감춰진 욕심과 죄악을 깨닫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발버둥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임을 기억하시고, 이번 한주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우리의 욕심과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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